우리 사회의 ‘조용한 사막화’에 대하여 [ 아렌트의 탄생성 ]
-관성의 궤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니티움을 향하여
인간은 중력에 지배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관습과 제도, 역할과 규범이 만들어 낸 고정된 질서라는 중력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중력의 궤도를 따라 노동하고 제작하며, 주어진 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에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아렌트가 말하듯, 인간은 그 중력을 거슬러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고정화된 세계 안에 새로운 시작을 여는 행위는 관성에 따라 반복되던 질서에 균열을 내는 사건이 됩니다. 인간은 그 질서 속에서 갑자기 새로운 말을 하고, 새로운 행동을 시작하며, 새로운 관계를 열어젖힐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중력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능력이 아렌트가 말하는 자유입니다. 자유란 마음속 기분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예측된 궤도를 벗어나 새로운 이니티움(initium)을 실제로 개시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정치적 안정과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시작이 펼쳐질 수 있는 공적 공간이 축소된다면, 인간의 날갯짓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할 수 있는 자리, 다른 선택을 실천할 수 있는 장, 세계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무대가 줄어들 때, 인간의 삶은 점점 관성의 궤도에 갇힌 삶이 됩니다. 숨은 쉬고 있지만,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억제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누구”로서 살아가지 못하고, 예측 가능한 “무엇”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인간다움의 상실이며, 아렌트가 경계한 사막화의 초기 징후입니다. ①필연성과 관성의 궤도-시작의 부재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종종 필연성과 관성의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안에는 시작의 새로움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먹고 자고 다시 일하는 생존의 순환은, 자연의 리듬에 종속된 반복의 구조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생물학적 필연성 속에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복해야 하는 존재”로 축소됩니다. 또한 “원래 그래왔다”는 말로 정당화되는 관습과 제도, 나이·성별·계층이 부여하는 역할들은 우리의 삶을 미리 그어진 관성으로 몰아넣습니다. 이러한 관성으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를 역사의 흐름 속 부속품처럼 느끼며, 다른 삶의 시작을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갑니다. ②“탄생성(Natality)”-Initium 한나 아렌트는 바로 이 지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녀는 관성과 필연성의 회로를 끊을 유일한 희망을 ‘탄생성(natality)’에서 찾았습니다. 탄생성의 개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에서 파악될 수 있습니다. Initium ut esset, creatus est homo "시작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창조되었다.“ 이 말은 인간이 단순히 이미 있는 세계에 추가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세계 안에 들어오지만, 세계의 기존 흐름을 그대로 반복하기 위해 들어오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따라서 탄생성은 ‘인간이 세계 안에 이전에 없던 존재로 등장하고, 그 존재가 기존 질서의 반복을 넘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에게 이니티움(시작)은 단순히 "무언가를 처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필연적인 인과관계의 사슬을 끊고, 예측 불가능한 기적을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③ 예측불가능성 여기서 새로운 시작이란 예측불가능성과 관련됩니다. 예측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대비로 명확히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상성의 세계’와 ‘유일성의 세계’의 차이입니다. 우선 예측 가능성은 정상성의 세계의 특징입니다. 이 세계는 기존의 질서체계, 관습, 상식, 집단적 편견을 당연시 하고 수용합니다. 이러한 전통적 상식과 편견에 기반한 정상성의 세계는 인간을 예측 가능한 존재로 만들고자 합니다. ‘사람은 원래 이래야 한다, 학생은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시민은 이렇게 순응해야 한다,’는 등으로 인간은 이 범주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러한 틀을 흔듭니다. 인간은 기존 질서 안에 태어나지만, 그 질서를 단순히 반복하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넘어 기존 질서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④ 유일성: 모든 인간은 대체 불가능한 ‘누구’입니다 인간 행위의 예측 불가능성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아렌트에게 그 근거는 유일성입니다. 그리고 이 유일성은 바로 탄생성에서 비롯됩니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인구가 한 명 늘었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 안에 이전에 없던 “누구”가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누구’는 ‘무엇’과 뚜렷이 구별됩니다. ‘무엇’은 그 사람을 기자, 학생, 시민, 노인, 청년, 노동자, 신자 같은 범주로 부를 때의 말입니다. 반면 ‘누구’는 모든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지니는 존재론적 고유성, 즉 다른 누구로도 완전히 대체될 수 없는 한 사람이라는 점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유일성을 지닌 존재만이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주어진 조건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과 행위를 개시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기존 질서의 관성은 인간을 예측 가능한 유형과 역할에 고정하려 하지만, 아렌트가 말하는 유일성은 인간이 그런 정형화된 틀을 넘어 새로운 시작을 열 수 있는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⑤ 관계성: 인간을 일반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 그렇다면 인간이 관성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실제로 만들어 내는 힘은 무엇일까요? 아렌트의 관점에서 그 핵심은 관계성, 곧 타인들과 함께 있는 복수성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경험입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앞에서 말하고 대화하는 순간에 비로소 특정한 목소리와 판단, 행위를 지닌 한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공적 세계 안에서 “나는 이렇게 본다”, “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행동할 때, 그는 더 이상 ‘학생’, ‘노동자’, ‘시민’ 같은 일반적인 무엇이 아니라, 고유한 누구로 등장합니다. 바로 이 관계성 속에서 “누구”로 출현하는 순간, 그는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자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행위자가 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됩니다. 따라서 정형화된 틀을 넘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유일성의 회복은 고립된 섬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만의 고유한 시각은, 그것을 듣고 응답해 줄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 곧 관계성 속에서만 힘을 얻습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복수성(plurality)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이 구조화된 조건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세계를 공유하고, 서로 다른 관점으로 말하고 판단하는 환경 속에서만, 각자의 유일성은 빛을 발하며 일반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작의 행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⓺ 자유: 내면의 의지가 아니라 공적 행위의 능력입니다 탄생성과 유일성, 복수성이 하나의 구조를 이룰 때, 그 정점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자유입니다. 아렌트에게 자유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유는 세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개시하는 능력, 곧 탄생성을 실제 행위로 꺼내는 힘입니다. 그래서 자유는 언제나 행위 속에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속으로 “나는 말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아직 아렌트가 말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말해야 합니다. 타인들 앞에 나와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을 드러내고, 그 말과 행위가 타인의 응답과 충돌하는 자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자유는 내면의 상태가 아니라, 공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현실화됩니다. 이 때문에 자유는 고립된 개인이 소유하는 사적인 속성이 아닙니다. 아렌트는 자유를 공적 자유(public freedom)라고 부르며, “자신의 생각을 행위와 말로 표현하는 자유”라고 규정합니다. 자유는 항상 타인과 함께 있는 복수성의 세계, 곧 공적 영역 속에서만 온전히 드러납니다. 결국, 탄생성은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고, 자유는 그 시작을 실제로 개시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복수성, 곧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위, 공적 참여를 통해 현실화됩니다.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를 세계 앞에 드러내며 새로운 시작을 열 때, 그 순간이 바로 아렌트가 말하는 자유의 순간입니다. ⓻ 공적 공간의 부재 이처럼 시작을 개시하는 능력으로서의 자유는 언제나 말과 행위, 그리고 그것이 펼쳐지는 관계성과 복수성 속에서 드러납니다. 문제는, 이 말과 행위가 실제 세계에서 봉쇄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탄생성과 유일성이 내재해 있더라도, 그것을 드러낼 공적 공간이 사라지면 행위는 불가능해지고,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은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때 결정적인 조건이 바로 공적 공간의 부재입니다. 말하고 행동할 무대가 없으면, 자유는 내면의 감정이나 신념으로만 머물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마음속 독백이 실제로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못하며, 어떤 세계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공적 세계가 닫히면, 자유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자유가 되고, 그 가능성은 시간이 갈수록 위축됩니다.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극도로 경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체주의는 단순히 폭력적 지배 체제라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유일성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주의 아래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고유한 관점에서 사고하고 판단하기보다, 이데올로기와 선전, 관료제의 언어를 반복하도록 강제됩니다. 그 결과 인간은 유일한 ‘누구’가 아니라, 서로 교체 가능한 ‘무엇’, 곧 집단의 부품이나 기능으로 취급됩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탄생성, 곧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은 구조적으로 거세됩니다. 이렇게 고유성과 유일성이 현실 속에서 발휘될 수 없게 될 때, 아렌트는 세계가 “사막(desert)”이 된다고 말합니다. 사막화된 세계에서는 관계성이 사라지고, 각자는 서로를 만날 수 있는 공적 공간 없이 사적인 생존만을 추구하는 고립된 존재로 전락합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 서로 다른 판단, 서로 다른 시작의 시도들이 지워진 자리에는, 하나의 목소리와 하나의 규범, 하나의 관성만이 남습니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새로운 시작을 꿈꾸지 못합니다. 시작의 꿈을 꾼다 해도, 그것을 말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장이 없기 때문에, 그 꿈은 점점 사라집니다. 세계는 다시 관성과 필연의 늪에 빠져, 이미 정해진 궤도를 무한히 회전하는 체계가 됩니다. 아렌트에게 공적 공간의 상실은 곧, 인간을 “시작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 탄생성의 정치가 붕괴하고, 인간을 예측 가능한 기능으로 환원하는 조용한 전체주의의 토대가 마련되는 순간입니다. ⑧장기보유특별공제 개편과 전체주의의 그림자 탄생성이 사라진 세계는 전체주의의 세계입니다. 복수성이 사라진 세계는 사막의 세계입니다. 공적 공간이 사라진 세계는 자유가 질식한 세계입니다. 최근 논의되는 장기보유특별공제 개편은, 겉으로는 부동산 세제의 기술적 조정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사막화된 세계의 전조를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표면상 장기보유특별공제는 “투기 억제”와 “주거 안정”을 위한 조세 기술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아렌트의 관점에서 보면, 특정 제도가 인간의 삶을 하나의 장소와 하나의 시간표에 고정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때, 그 효과는 단순한 세제 조정의 차원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한곳에 머무르도록 설계된 존재가 아닙니다. 가족 구조가 바뀌고, 직업이 바뀌고, 건강 상태가 바뀌고, 공동체와의 관계가 달라지면, 삶의 장소도 달라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동은 단순한 주소 변경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장기보유특별공제를 과도하게 “장기 거주”와 결합시키거나, 10년 이상 한곳에 머물러야만 세제상 불이익을 피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한다면, 국가는 세금의 형식을 통해 인간의 삶을 관성의 궤도에 붙잡아 두는 강력한 인센티브를 만들게 됩니다. 오랫동안 거주할수록 세금을 크게 깎아주고, 이동할수록 세 부담이 가파르게 증가하는 구조는, 인간을 움직임을 멈추는 존재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국가는 투기 억제와 주거 안정을 목표로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목표가 과도한 세제 압박으로 변형될 때입니다. 거주이전의 자유는 형식적으로 남아 있어도, 실제로는 “이사 한 번 하면 수억 원의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공포가 이동의 자유를 질식시킬 수 있습니다. 이때 시민은 새로운 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세제 설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객체로 점차 전락합니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보면, 장특공제 개편은 단순한 부동산 과세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새로운 세계로 이동할 가능성,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 기존 삶의 조건을 벗어나 다시 시작할 가능성을 조세 구조를 통해 제한하는 문제입니다. 탄생성은 인간이 기존 질서의 반복에만 갇히지 않고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세제가 “오래 머물수록 유리하고, 움직일수록 불리하다”는 방향으로 과도하게 설계되면, 그 제도는 인간을 새로운 시작의 존재가 아니라 기존 위치에 고정된 존재로 만들게 됩니다. 더 깊은 층위에서는 복수성의 축소가 나타납니다. 복수성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관계를 맺고,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펼칠 수 있을 때 살아납니다. 주거 이동이 과도한 세금 부담으로 억제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지역·새로운 공동체·새로운 공적 관계로 들어갈 가능성을 잃습니다. “이 동네의 사람은 이렇다”, “이 계층은 여기에 산다”는 공간적 고정이 강화될수록, 서로 다른 삶이 섞이고 부딪히며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기회는 줄어듭니다. 이동의 위축은 단순한 부동산 거래량 감소가 아니라, 인간이 새로운 세계와 만날 통로의 축소입니다. 이런 점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거주이전의 자유는 단지 “이사할 수 있는 물리적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장소를 선택하고, 관계의 장을 바꾸고, 다른 조건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탄생성의 자유입니다. 조세 제도가 이 자유를 직접 금지하지 않더라도, 과도한 불이익을 통해 사실상 이동을 억제한다면, 그 자유는 실질적으로 약화됩니다. 삶은 한 장소에 고정되고, 관계는 굳어지며, 세계는 더 닫힌 구조가 됩니다. 그래서 더불어 민주당이 발의한 공소취소권의 정치화가 법정이라는 공적 공간에서 말과 판단의 장을 닫는 문제라면, 장기보유특별공제의 과도한 설계는 생활세계에서 이동과 만남의 공적 가능성을 닫는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적 언어와 해석의 다원성을 억제하고, 다른 하나는 삶의 장소와 관계의 선택지를 실질적으로 좁힙니다. 영역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을 더 예측 가능한 존재로 만들려는 힘입니다. 법정에서는 다른 판단이 사라지고, 주거에서는 다른 삶의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결국 이러한 법제화의 이면에는, 인간을 국가 정책의 목표 아래 고정하고 관리해야 할 객체로 보는 시선이 자리 잡을 위험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체주의의 망령이 어른거립니다. ‘조세 정의’, ‘주거 안정’이라는 명분이 인간의 탄생성, 즉 삶의 매 순간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압도하는 순간, 세제는 정의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 삶을 관성에 묶어 두는 장치, 시민의 일상을 보이지 않게 통제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계엄령”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관성의 궤도를 공전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이동하고, 관계 맺으며, 세계를 향해 자신을 새롭게 출현시키는 존재입니다. 아렌트의 말대로, 인간은 그 자체로 시작(initium)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세제와 법제도는 인간을 한 자리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시작이 세계 속에서 실제 행위로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을 지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인간의 본질인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제도에 의해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 보호받게 됩니다. 결국 국가는 인간을 통계와 기능으로만 계산하는 대신, 언제든 다른 삶을 선택하고, 다른 관계를 맺고, 다른 판단을 말할 수 있는 존재로 대우해야 합니다. 그렇게 설계된 세금과 법, 절차 속에서만 인간은 관성의 궤도를 따라 “관리되는 대상”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새롭게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자로 서게 될 수 있습니다. Initium ut esset, creatus est homo. 시작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창조되었다. ⓼ 전체 내용 정리 결국 아렌트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관성과 필연성의 반복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먹고 자고 일하고 다시 버티는 생물학적 필연성, “원래 그래왔다”는 관습의 관성, 나이와 성별과 계층이 부여하는 고정된 역할은 인간을 예측 가능한 존재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누구”로 나타나지 못하고, 기능과 역할로만 이해됩니다. 노인은 노인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시민은 시민답게, 노동자는 노동자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식의 정상성은 인간을 정형화된 틀 안에 가둡니다. 그러나 아렌트가 말한 탄생성은 바로 이 정상성의 세계에 대한 근본적 반박입니다. 인간은 이미 주어진 세계 안에 태어나지만, 그 세계의 기존 흐름을 단순히 반복하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시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이 하나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 이전에 없던 “누구”가 등장한다는 뜻입니다. 이 유일한 “누구”는 기존의 관습과 제도와 편견이 예측하지 못한 말과 행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측불가능성은 인간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핵심입니다. 인간이 완전히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존재라면, 그는 더 이상 행위자가 아니라 시스템의 부속품이 됩니다. 반대로 인간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가 아직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기존 질서의 반복자가 아니라, 그 질서 안에 균열을 내고 다른 가능성을 열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유일성은 고립된 개인 안에서 저절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타인 앞에서 말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누구”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탄생성은 관계성 속에서 현실화되고, 유일성은 복수성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자유 역시 내면의 의지나 선택 감정이 아니라, 타인들과 함께 있는 세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개시하는 공적 행위의 능력입니다. 말할 수 있는 공간, 들을 수 있는 타인, 응답할 수 있는 관계가 있을 때 인간은 자유로워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적 공간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공적 공간이 사라지면, 인간은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낼 수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낼 수 없으면 새로운 시작도 불가능해집니다. 그때 자유는 내면의 감정으로만 남고, 인간은 다시 생존의 필연성과 사회적 관성 속으로 밀려납니다.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극도로 경계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전체주의는 단순히 폭력적인 정치체제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유일성을 말살하는 체제입니다. 전체주의는 인간이 자기 고유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는 능력을 파괴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의 이념, 하나의 명령, 하나의 시스템 안에 편입시킵니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이상 대체 불가능한 “누구”가 아니라, 교체 가능한 “무엇”이 됩니다. 그는 행위자가 아니라 기능자가 되고, 시민이 아니라 부품이 됩니다. 이때 가장 치명적인 것은 탄생성의 거세입니다. 전체주의는 인간에게서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빼앗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르게 시작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합니다. 기존 질서에 순응하거나, 명령을 수행하거나, 생존을 위해 침묵하는 것만이 남습니다. 세계는 복수성의 공간이 아니라 획일성의 공간이 됩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사라지고, 관계성은 끊어지며, 인간은 고립됩니다. 그렇게 인간의 유일성과 관계성이 사라질 때 세계는 사막이 됩니다. 사막화된 세계에서는 말과 행위가 자라나지 못합니다.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도, 자신만의 판단을 드러내는 용기도, 새로운 시작을 상상하는 힘도 말라갑니다. 인간은 다시 필연성과 관성의 늪으로 되돌아갑니다. 먹고살기 위해 반복하고, 관습에 따라 순응하며, 시스템이 정해준 역할을 수행하는 삶만이 남습니다. 그러므로 아렌트의 탄생성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체주의적 세계에 대한 정치적 저항의 원리입니다. 인간은 언제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 인간은 결코 하나의 유형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는 믿음, 인간은 타인들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행위자가 된다는 믿음이 탄생성의 핵심입니다. 결국 문제는 이것입니다. 인간을 예측 가능한 부속품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예측 불가능한 시작의 존재로 인정할 것인가. 전체주의는 전자를 선택합니다. 아렌트는 후자를 붙듭니다. 전체주의는 인간을 고립시키고, 침묵시키고, 동일화합니다. 아렌트는 인간을 다시 말하게 하고, 관계 속에 세우며, 공적 세계 안에서 “누구”로 출현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인간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공적 세계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로 등장할 수 있는 복수성의 공간입니다. 그곳에서만 탄생성은 자유가 되고, 자유는 행위가 되며, 행위는 세계를 새롭게 여는 시작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