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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낙인 정치'를 넘어 '가치 상수'의 회복으로 - '절윤' 프레임의 함정 [ 무조건적 자기수용, USA ]

-배에 구멍이 났다고 배를 버릴 것인가?

배에 구멍이 났습니다. 그렇다고 선장이 배를 침몰시킬 권리는 없습니다.

선장의 유일한 임무는 어떻게든 그 배를 수리하여 목적지까지 항해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는 수행 결과가 아무리 참담하더라도 '존재의 근거'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즉 존재는 평가의 대상이 아니며, 행동이 평가의 대상일 뿐입니다.

◆ 행동을 평가, 존재는 수용-변수가 잘못되었다고 상수를 고치다니

우리는 흔히 실수를 저질렀을 때 자신을 향해 가장 가혹한 판결을 내리곤 합니다. "시험에 떨어졌으니 나는 낙오자다", "실수를 했으니 나는 한심한 인간이다"라는 식의  비난은 우리를 깊은 우울의 늪으로 밀어 넣습니다.

하지만 인지행동치료의 거장 알베르트 엘리스(Albert Ellis)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는 '행동'은 냉정하게 평가하되, '존재'는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라고 조언합니다.

그의 이론은 ‘무조건적 자기수용(USA: Unconditional Self-Acceptance)’이론으로써,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You rate and evaluate your thoughts, feelings, and actions in relation to your main Goals of remaining alive and reasonably happy to see whether they aid these Goals. When they aid them, you rate that as “good” or “effective,” and when they sabotage your Goals you rate that as “bad” or “ineffective.” But you always—yes, always—accept and respect yourself, your personhood, your being, whether or not you perform well and whether or not other people approve of you and your behaviors.

 “당신은 자신의 생각, 감정, 행동이 ‘살아 있고, 합리적으로 행복하려는 주요 목표’에 비추어 볼 때 그 목표에 도움이 되는지를 평가한다. 도움이 되면 그것을 ‘좋다’, ‘효과적이다’라고 평가하고, 그 목표를 방해하면 ‘나쁘다’, ‘비효과적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당신은 — 그렇다, 항상 — 수행을 잘하든 못하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과 당신의 행동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당신이라는 존재’(인격, 존재자)를 언제나 수용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 문장이 담고 있는 핵심은 “행동은 평가하되, 존재는 평가하지 않는다”는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이를 수학적 개념으로 비유하자면,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상수’이며 행동은 조건에 따라 계속 바뀌는 ‘변수’와 같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살아있다는 존재의 사실은 성적표나 타인의 비난으로 그 값이 변하지 않는 상수인 반면, 내가 선택한 대화 방식이나 업무 습관 같은 행동들은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하고 업데이트할 수 있는 변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변수인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상수인 존재의 가치를 0이나 마이너스로 고치려 드는 명백한 ‘계산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엘리스는 이러한 태도가 마치 배에 작은 구멍이 났다고 해서 배 전체를 바다에 버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경고합니다. 구멍이 난 곳은 수리해야 할 ‘변수’일 뿐, 배라는 ‘상수’ 자체가 쓸모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가장 잘 실천하는 사람은 아마도 실험실의 과학자일 것입니다. 과학자는 실험에 실패했다고 해서 “나는 과학자로서 자격이 없으니 실험실을 폭파하겠다”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이번 가설과 방법은 틀렸으니, 다음에는 변수를 바꿔서 다시 시도해야겠다”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그에게 실패는 ‘나라는 존재의 무가치함’을 증명하는 판결이 아니라,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수정이 필요한 데이터’를 하나 발견한 유익한 과정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행착오는 나를 폐기하기 위한 근거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더 합리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항로를 수정해야 할 지점을 알려주는 이정표입니다.

존재라는 단단한 상수 위에서 행동이라는 변수를 끊임없이 튜닝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엘리스가 말하는 무조건적 자기수용의 실천적인 모습입니다.

 ◆평가의 대상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할 대상은 결코 ‘나 전체’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선택한 특정한 행위나 사고, 혹은 일시적인 정서만이 평가의 도마 위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은 비합리적이다”라거나 “이 행동은 내 행복에 비효과적이다”라는 식의 기능적인 진단은 오히려 성장을 위해 권장되어야 할 태도입니다.

반면, 어떤 행동을 근거로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다”라거나 “가치 없는 존재다”라고 낙인찍는 전인적·총체적 평가는 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부당합니다. 특정 시점의 수행 결과만으로 그 존재 전체를 ‘합격’이나 ‘불합격’으로 처리하는 것은 명백한 범주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수용이란

진정한 자기수용은 ‘나라는 존재’와 ‘나의 행위’를 엄격히 분리하는 지점에서 완성됩니다. 자기수용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 행동이 ‘합리적으로 행복해지려는 목표’에 도움이 되는지는 철저히 평가하되, 그 결과가 어떻든 존재 그 자체는 항상 수용하고 존중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행동은 “효과적 혹은 비효과적”이라는 관점에서 끊임없이 교정해 나가야 할 대상이지만, 그 평가를 나 전체에 대한 가치판단으로 확장해서는 안 됩니다. 특정 과제에서 실패했다면 그것은 오직 ‘과제 수행에서의 실패’를 의미할 뿐입니다. 거기서 곧바로 “나는 실패자다”라는 전면적인 자기부정으로 비약하는 추론의 오류를 경계해야 합니다.

 ◆평가의 기준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평가의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선택이 내가 설정한 삶의 목적(신의 뜻)에 얼마나 기여하는가?” 하는 실천적인 질문입니다.

유능한 항해사는 배에 구멍이 났다고 해서 배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배를 버리는 대신 구멍을 수리하며 “내 배가 가려는 방향으로 다시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산에 핀 꽃이나 밤하늘의 별에게 "너는 가치가 있느냐"고 묻지 않듯, 이미 이 세계에 주어진 인간의 존재 역시 평가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도덕적 절대값’의 법정에 세워 “화를 내다니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나쁜 사람이다”라고 심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지금 화를 내는 것이 평온을 유지하고 행복하게 보내려는 내 목표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라면 다음엔 다른 방법을 써보자”라고 유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 무조건적 자기수용, USA의 이중태도

알베르트 엘리스가 제안한 무조건적 자기 수용(USA, Unconditional Self-Acceptance)은 ‘나라는 존재 전체’를 점수 매기거나 등급화하지 않으려는 단단한 철학적 태도입니다. 이는 성취의 정도나 타인의 인정, 혹은 도덕적 결함의 유무와 상관없이,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삶의 기본 목표인 “살아남아 합리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과 감정, 행동이 그 목표에 도움이 되는지는 얼마든지 평가할 수 있습니다. 특정 행동이 목표에 기여한다면 이를 “효과적이고 바람직하다”고 긍정하고, 방해한다면 “비효과적이고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수행의 결과가 어떠하든, 혹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인간으로서의 ‘나’ 자체는 언제나 수용과 존중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USA의 정신은 조건적 자존감(CSE, Conditional Self-Esteem)의 함정을 의식적으로 거부합니다. 조건적 자존감은 “성공해야만 가치 있다”거나 “남들이 인정해 줄 때만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자기 가치에 끊임없이 조건을 붙입니다.

엘리스는 이러한 구조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매우 해롭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USA는 수행이 나쁠 때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할지언정, 그 결과를 결코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다”라는 존재 전체의 부정으로 연결하지 않습니다.

결국 진정한 자기 수용이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바꿀 수 있는 조건은 계속해서 바꾸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이중 태도’를 갖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의 이런 행동과 특성을 매우 싫어하고, 바꾸고 싶고,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나 자체는 받아들인다”는  균형 잡힌 이중 태도가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비윤리적이거나 유해한 행동을 강하게 비판하고 변화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 행동을 근거로 자신이나 타인을 “쓰레기” 혹은 “악마” 같은 전면적인 규정으로 낙인찍지 않겠다는 실존적 선언이기도 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수호하고 이에 기초한 행동을 설계해야

최근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는 ‘절윤(絶尹)’ 공방을 지켜보며 많은 국민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특정 인물과의 관계를 끊어내느냐 마느냐 하는 지표가 정책 검증이나 성과 분석을 넘어, 한 정치인의 정체성 전체를 심판하는 잣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를 향해 쏟아지는 “절윤하지 않는다” “맑던 자기 가치를 파느냐”는 식의 비난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은 대개 ‘사람이 한 행동’과 ‘사람의 존재’ 자체를 동일시하는 논리적 오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우리 정치는 합리적 토론장이 아닌 인격 살해의 법정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앞에서 분석된 알베르트 엘리스가 제안한 ‘무조건적 자기수용(USA)’의 지혜를 빌려올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인간의 가치는 조건부 채점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할 대상은 오직 그 사람이 선택한 ‘행동’뿐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를 정치의 언어로 번역하면, 흔들리지 않는 상수는 보수가 지켜내야 할 핵심 가치인 공동체의 안정, 헌정질서의 존중, 그리고 책임정치의 구현등입니다. 이러한 상수와 구별되는 변수가 절윤등의 행동입니다.

이에 비추어 볼때, 보수가 지향하는 존재론적 가치와 정당성은  정무적 선택이나 특정 인물과의 거리감인 변수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국민의힘은 이제 논쟁의 프레임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누구와 결별하면 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이다”라는 식의 이분법적 심판은 정치를 아주 협소하게 만듭니다. 그보다는 보수의 가치를 굳게 세우고, 이 기준에 비추어 어떠한 전략을 구체화할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절윤하지 않으니 당신은 끝났다”는 식의 총평은 상대를 악마화하여 존재를 절단하는 거친 언어일 뿐입니다. 이러한 낙인 정치는 결국 우리 사회의 공론장을 황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국민의힘이 가장 우선시해야 할 과제는 명확합니다. ‘절윤’이라는 프레임을 흉기 삼아 서로의 정체성을 난도질하며 동지의 존재 자체를 공격하는 소모적인 내전을 즉각 중단하는 것입니다. 국민의힘이 집중해야 할 것은 보수의 가치라는 존재론적 상수를 굳건히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행동의 영역(선거 전략)을 정밀하게 정립하는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절윤’ 논쟁은 하나의 정치적 선택일 뿐인 ‘행동’을 보수의 ‘존재 가치’ 그 자체로 둔갑시키는 심각한 범주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만약 절윤 여부가 보수의 가치를 지키는 척도라면, 보수진영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미 재판부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장기 집권을 위한 사적 행위가 아니라고 판시했음에도, 일부 진영(국민의 힘 일부 세력들 포함)은 이를 사적 욕망으로 등치하며 공격의 빌미로 삼고 있습니다.

그 행보의 본질이 장기 집권이 아닌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자유'라는 보수의 핵심 가치를 수호하려 했던 실존적 결단(그 방식이 투박하였음에도)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보수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행위를 단절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도대체 ‘절윤’은 무엇과의 단절이며 어떤 가치를 위한 이별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국민의힘에게 필요한 것은 존재를 부정하는 칼날이 아니라, 보수가 공유하는 상수를 확인하고 그 위에서 가장 효과적인 승리의 변수를 찾아내는 지혜입니다.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를 껴안고, 오직 잘못된 전략과 행위만을 냉정하게 수정해 나가는 태도야말로 보수 재건을 위한 유일한 항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