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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 상처입은 치유자 ①] 상처는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별

-치유는 Fixing이 아니라 Holding

우리는 흔히 공동체 안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보듬기 위해 냉철한 통찰이나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 같은 특별한 역량이 필요하다고 믿곤 합니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의 거장 칼 융(Carl Jung)과 현대 영성의 대가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이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오직 상처 입은 자만이 타인을 진정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진리를 길어 올렸습니다.

 이러한 '상처입은 치유자'의 관점에 의하면, 진정한 치유의 힘은 강함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 속에 있습니다. 상처는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 무게를 함께 견뎌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심연을 함께 건너는 동반자가 되어주는 일입니다


◆  헨리 나우웬이 말하는 ‘환대’로서의 치유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개념을 현대의 대중적인 언어로 정착시킨 인물은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이자 작가인 헨리 나우웬입니다. 1972년 출간된 그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는 현대인이 겪는 근원적인 고통을 ‘단절’과 ‘외로움’으로 진단하며, 치유자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나우웬은 사역자나 상담자가 특별히 고통에서 면제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외로움과 상처를 솔직히 바라보고 인정할 때, 타인의 아픔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 마음속에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그는 상처를 감춘 채 누군가를 도우려는 태도를 경계하며, 그것은 “물이 없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에게 치유는 문제를 ‘고쳐 주는 기술’이 아닙니다. 자신의 상처를 통로로 삼아 타인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는 ‘환대(Hospitality)’의 행위입니다.

여기서 환대란 단순히 위로의 말 몇 마디를 건네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고통을 서둘러 해석하거나 처방으로 덮지 않고, 그 고통이 안전하게 머물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고통받는 이는 이러한 안전한 공간 안에서야 비로소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감각을 되찾고, 자신의 상처를 말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치유자는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머무는 공간을 제공하고 그 공간에서 무너지는 시간을 함께 견뎌 주는 사람입니다. 결국 상처를 부정하지 않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사람만이 고통받는 이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  케이론, 고통과 불멸의 딜레마

이 심오한 개념의 뿌리는 그리스 신화 속 켄타우로스(半人半馬) 가운데 ‘현자’로 알려진 케이론(Chiron)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케이론의 신화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치유자가 겪어야 할 숙명적인 역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은유입니다.

① 풀리지 않는 역설: 최고의 의술 vs 불치의 상처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케이론은 아폴론에게 의술을, 아르테미스에게 사냥을 배운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의술의 신), 아킬레우스, 헤라클레스 등 수많은 영웅이 그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극적인 사고로 제자인 헤라클레스가 쏜 독화살을 맞게 됩니다. 그 화살에는 닿기만 해도 살이 썩어 들어가는 히드라의 맹독이 묻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케이론이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불멸의 존재’였다는 점입니다. 죽을 수조차 없었기에, 그는 영원히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끔찍한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약초를 연구하고 의술을 연마했습니다.

여기서 위대한 역설이 탄생합니다. 자신을 치료하려는 그 처절한 노력이, 그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②프로메테우스와의 교환, 그리고 별이 된 상처

신화의 결말은 더욱 상징적입니다. 케이론은 제우스에게 간청하여 자신의 ‘불멸성’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합니다. 대신 그 불멸의 권리를 제우스의 형벌을 받고 있던 프로메테우스에게 양도하여 그를 해방시킵니다.

자신의 고통을 끝내기 위한 죽음이, 인류에게 불(문명)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의 구원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제우스는 이 숭고한 희생을 기려 그를 밤하늘의 ‘궁수자리’로 올려주었습니다. 이는 치유자가 자신의 상처를 억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타인의 구원을 위한 거름으로 삼을 때 비로소 고통에서 해방되어 별처럼 승화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결국 나의 가장 깊은 상처를 타인을 위한 빛으로 바꿀 때, 그 희생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거룩한 구원의 통로가 됩니다. 나를 태워 타인을 밝히는 그 순간, 영원히 낫지 않던 상처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 칼 융과 상처 입은 치유자

분석심리학자 칼 융(C.G. Jung)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신화적 원형을 현대 심리치료의 핵심 기제로 재해석했습니다. 그는 1951년 저서 《심리치료의 실제(The Practice of Psychotherapy)》를 통해 이 개념을 구체화합니다. 

그 핵심이 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We could say, without too much exaggeration, that a good half of every treatment that probes at all deeply consists in the doctor's examining himself, for only what he can put right in himself can he hope to put right in the patient. It is no loss, either, if he feels that the patient is hitting him, or even scoring off him: it is his own hurt that gives the measure of his power to heal. This, and nothing else, is the meaning of the Greek myth of the wounded physician."

"과장 없이 말하건대, 깊이 있는 탐색이 이루어지는 모든 치료의 절반은 의사 자신의 자기 성찰로 이루어집니다. 의사는 오직 스스로의 안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것만을 환자에게서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의사가 환자에게 타격을 입거나 심지어 패배감을 느낀다 해도 그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치유의 힘을 가늠하는 척도는 다름 아닌 의사 자신의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상처 입은 의사'라는 그리스 신화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 인용문 중 다음의 두 대목은 '상처 입은 치유자'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①치유의 한계: "자신 안에서 바로잡은 것만이..."

"...only what he can put right in himself can he hope to put right in the patient." "자신 안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것만이, 환자 안에서도 바로잡을 수 있기를 희망할 수 있다."

이 문장은 치유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합니다. 만약 치유자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분노, 두려움, 트라우마를 외면하고 있다면, 환자가 겪는 유사한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거나 도울 수 없습니다. 치유자가 도달해 본 내면의 깊이가, 곧 그가 환자를 이끌고 갈 수 있는 한계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융은 진정한 치유란 환자를 고장 난 기계처럼 수리하는 기술적 과정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치유자 스스로 자신의 무의식과 상처, 그리고 그림자(Shadow)를 직면하고 다루지 않는다면, 그 치료는 기계적이고 표면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치유자에게 상처란 숨겨야 할 약점이 아니라, 탐구해야 할 자산입니다.

② 치유의 척도: "상처가 곧 힘의 척도다"

"It is his own hurt that gives the measure of his power to heal." "자신의 상처가 치유의 힘을 재는 척도가 된다."

여기서 융이 사용한 'Measure'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이는 단순한 '크기'를 넘어 '기준, 척도, 측정 도구'를 뜻합니다. 즉, 치유자의 상처는 타인의 고통을 재는 '정밀한 온도계'와 같습니다.

내가 섭씨 100도의 고통으로 펄펄 끓어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눈앞의 상대가 겪는 90도의 고통을 정확하게 감지하고 측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려가 보지 않은 심연으로는 결코 환자를 안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치유자가 겪어낸 고통의 종류와 깊이, 그리고 그것을 견뎌낸 시간은 그가 타인을 이해하고 담아낼 수 있는 '공감의 용량(Capacity)'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기준값이 됩니다.


◆ 바라보는 치유자: 상처가 곧 깊이이다

 이처럼 융은 진정한 치유에 대한 답을 높은 권위나 지식이 아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상처’에서 찾았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치유의 힘, 그 역설적인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 치유의 조건: 상처의 깊이 

융은 치유의 능력이 학위나 자격증과 같은 외적 조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아픈 사람이 남을 더 잘 이해할 것"이라는 막연한 도덕적 위로 역시 진정한 치유력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치유의 힘이 치유자의 '완벽함'이 아닌, '상처의 깊이'에서 나온다고 역설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회피하거나 피상적으로만 다룬 사람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피상적인 위로밖에 건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융에게 치유자의 자격이란 "자신이 얼마나 처절하게 아파보았으며, 그 고통을 얼마나 의식적으로 소화해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 능력 확장의 기회: 역전이의 활용 

융은 상담 과정에서 환자가 치료자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상황조차 ‘손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 순간은 치유자의 그릇을 확장할 결정적인 기회입니다. 환자의 분노와 저항이 치료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치료자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건드려졌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치유자는 “내 안의 상처가 반응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이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즉, 환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치유자 역시 끊임없이 치유되고 성장하는 역설적인 확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상처 입은 자의 소명(Calling) 

융은 이 논리의 정점에서 그리스 신화 속 ‘케이론(Chiron)’을 소환합니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은 없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 신화 속 '상처 입은 의사'의 진정한 의미다." (This, and nothing else, is the meaning of the Greek myth of the wounded physician.) 

죽은 자도 살리는 의술을 지녔으나 정작 자신의 상처는 영원히 낫지 않아 고통받았던 케이론에 대해, 융은 그 ‘낫지 않음(Incurability)’이 케이론을 무능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치유의 신으로 만든 유일한 원천이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의 상처가 영원했기에 타인을 향한 연민과 치유의 힘 또한 영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융의 메시지는 상처 입은 모든 인간에게 전하는 엄중한 소명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의 크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처를 얼마나 깊이 껴안았느냐에 따라 정확히 결정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상처는 숨겨야 할 약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아픔을 읽어내며 타인의 고통과 진정으로 연결되게 하는 유일한 통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갖는 두 가지 실존적 권능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이를 통합해낸 치유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얻게 될까요? 이것이 바로 융과 헨리 나우웬이 공통적으로 지목한 진정한 ‘치유의 권능’입니다.

첫째, 고통의 본질을 감지하는 능력입니다. 

고통을 이론으로만 배운 사람은 환자의 말을 듣는 순간 분석하려 들거나 성급한 해결책으로 덮으려 하기 쉽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라며 정답으로 감정을 차단하거나, "이렇게 해보세요"라며 기술적인 조언으로 상황을 종료하려 합니다. 반면 처절한 상처를 통과해 본 치유자는 다릅니다. 그는 환자의 수많은 언어 뒤에 숨겨진, 지금 이 사람이 '진짜 아파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본능적으로 포착해냅니다. 그들에게 타인의 고통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세포가 기억하고 있는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통의 심연을 함께 견디는 능력입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도 친절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타인의 깊은 심연과 마주할 때, 그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압도적인 고통을 황급히 치우려 하거나 회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 깊은 어둠을 직면해 본 사람은 환자의 고통이 터져 나올 때 도망가지 않습니다. "아, 지금 여기서 가장 아픈 것이 올라오고 있구나"라고 담담히 알아차리며, 그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함께 머무를 수 있습니다.

융이 말하는 진정한 치유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낫게 해줄게(Fixing)"라는 기술적 오만이 아니라, "네가 무너지지 않게 내가 여기 버티고 서 있을게(Holding)"라고 말하는 묵직한 동행의 힘입니다.

결국 자신의 아픔을 깊이 겪어내고 소화한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에 안전하게 접속할 수 있는 '영혼의 자격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는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별

치유자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술자’가 아니라, ‘고통의 심연을 함께 건너는 동반자’입니다. 

아파본 사람은 환자의 떨리는 목소리, 흔들리는 눈빛, 그리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통의 냄새를 맡습니다. 그는 섣불리 타인의 고통을 짐작하거나 재단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저 그 아픔의 곁에 가만히 서서, 그 시간들을 함께 견뎌냅니다.

이때 고통의 주파수를 맞추는 ‘공명(Resonance)’이 일어납니다.

환자가 이렇게 “내가 깊이 이해받고 있다”는 강력한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치유자가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그 아픔을 통로 삼아 환자의 고통과 진정으로 ‘함께 진동’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치유자의 눈빛 속에서, 자신이 홀로 고립된 섬이 아님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짜 치유자란 환자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사람입니다. 그 처절한 자기 성찰의 깊이만큼, 타인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에서 상처받은 자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역할을 담당할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겪은 실패와 상실, 여전히 욱신거리는 그 아픔들은 감추어야 할 부끄러운 흉터가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의 숨겨진 고통을 읽어내는 예민한 눈이자, 누군가의 슬픔을 진심으로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증명입니다.

그렇기에 밤하늘의 궁수자리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듯, 우리가 짊어진 상처는 훗날 누군가의 어두운 길을 비추는 별이 될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깊은 위로이자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