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비속의 질주에서 서킷을 벗어나, 화염에 휩싸인 니키의 페라리
◇상황 어떤 이유로 창피스러워지는 상황 ◇의미 to cause another person to feel embarrassed or ashamed to destroy self-confidence and composure.◇예문 ▪He was abashed at his own ignorance ▪He was not at all abashed by her open admiration.◇발음 ash cash abash 모두 ash로 유사 발음◇유의어 confound, discomfit, disconcert, discompose, nonplus◇반의어 encourage, calm ▶confound 주로 A와 B를 혼동 할 때 confound 가 사용된다. 즉 카페라떼와 카푸치노를 혼동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 사용된다. 1)confuse : confound means with end 2)abash : He was confouned at the sight of the teacher. 3)frustrate : to confound a plot4)make worse :▶discomfit = disconcert = discompose = nonplus ▪This ruse(계략
“건축에 사용할 목재를 점검하고 있는 슈바이처 1954”이 사진이 유진 스미스를 TV가 발명되기 이전 최고의 보도사진전문지 LIFE를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우선 슈바이처가 하얀 옷을 입고, 하얀 모자를 쓰고 있다. 슈바이처 머리위로 흑인 한명이 올라타 있는 듯한 모습을하고 있고, 주변에 검은 손들은 도움을 갈구하는 것처럼 슈바이처를 향하고 있다. 또한 목재를 점검하고 있는 이 사진은 예수의 공생에 이전의 직업인 목수 이미지와 겹친다. 라이프의 편집진은 이 점에 착안하여, 슈바이처를 성자로 묘사하고 이 사진을 부각시키고자한다. 하지만 유진은 슈바이처를 휴머니즘이 가득한 한 인간으로 그리고 싶어한다. 슈바이처는 saint가 아닌 것이다.이러한 편집진의 의도에 반발하여 그는 최고의 보도사진잡지 라이프를 미련없이 떠난다. 이는 그가 백조처럼 오만하다는 평가보다, 그의 마음이 시류에 타협하지 않는 외곬으로, 곧고 바르다는 의미 일게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굽어진 역사를 제대로 펴 온 자들은 바로 이러한 꼿꼿함으로 삷을 견뎌왔다. 단재 신채호는 일본강점기에 세수를 할 때, 목을 숙이지 않은 채 서서 세수를 했다고 한다. 단재는 세
유진 스미스의 인간의 존엄에 대한 깊은 관심이 그의 작품에 살아 숨쉰다.특히 그는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래서 시골의 의사나, 조산원,스페인 마을의 농부등을 그의 작품의 주된 소재로 삼았다는 점은놀라운 발견이 아니다.
휴식은 반복된 일상으로부터 비롯된 지친 피곤의 덩어리(block)를 터뜨리는(burst) 신선한 파괴이다. 그래서 blockburst영화에 마음을 맡기는 일도 또 다른 휴식인 셈이다. 블록버스터의 정의 는 인풋과 아웃풋의 관점에서 혼용되고 있다. 투입기준으로 한국영화사상 최고투자액인 430억을 들인 설국열차를 블록버스터라 칭하고 있다. 산출기준으로는 통상 미국의 매표매출로 북미 1억달러이상, 세계 4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 영화를, 1억달러의 벽(block)을 넘어섰다(burst)는 뜻으로 blockburst라 일컫는다.그런데 운동전에 가벼운 스트레칭이 기본이듯, 우선 우리의 머리 속에서 블록버스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먼지를 한번 툭툭 털어보자. ◆ 뉴 아메리칸 시네마 (1967-75)블록버스터 이전 시기의 영화는 ‘뉴아메리칸 시네마’로 지칭된다. 내일을 향해 쏴라 이지라이더같은 도전적 주제를 담은 실험적인 저예산영화가 작가주의 이름하에 등장한 것이다. 1967년 아서 펜 감독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원작 보니앤 클라이드)가 개봉되자, Time지는 “폭력과 섹스가 가미된 새로운 미국영화가 몰려오고 있다.”며, 이 새로운 물결을 ‘뉴아메리칸 시네마’로 명명하
이 사진은 ‘부상당한 아이’ 혹은 ‘살아남은 아이’로 불리기도 한다. 1944년, 전쟁터 사이판에서 미 해병이 유일하게 생존한 아이를 들고있는 모습이다. 유진 스미스는 세상은 황폐화되었지만, 이 아이는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산책 길에서 예쁜 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의 반응이 다르다. 꽃을 뽑아 소유하려 하는 사람과 꽃을 꺾으려 하지않고 살펴볼 뿐인 사람. 소유는 곧 그 꽃의 생명의 파괴이며, 바라봄은 꽃과의 결합이다. 계속되는 지역 분쟁과 계급전쟁은 항상 탐욕에 기초한 소유양식에 비롯된 것이다. 이라크의 미국의 침략도 석유를 둘러싼 소유권 다툼이다. 더 강하고 조건이 좋은 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기위해 약자를 이용하려 드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To have or to be'는 인간의 성격구조를 소유와 존재의 두 양식으로 나누고, 소유지향에서 존재지향으로의 전환만이 폭력에서 연대와 애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래서 그는 이를 위해 인간과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명제를 제시한다. --축재와 착취에서가 아니라 나누어주고 공유함으로부터 기쁨을 가질 것--자기도취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버리고 인간의 비극적 유한성을 받아 들일 것--건전하고 이성적인 소비를 지향 할 것 --타인을 기만하지않고 타인에게서 기만당하지 않을 것 --모든 생명체와 일체감을 느낄 것, 그럼으로써 자연을 정복,지배,약탈하려는 목표를 버리고 자연과 협동하려 할 것. 이 책은 인간이 소유양식이라는 탐욕
갈증에콜라 첫잔을 들이키면 청량감을 느낀다. 다시 또 추가 한잔을 마실 땐 시원함 대신 텁텁함이 입안을 감돈다. 콜라 소비량이 늘어 갈수록 만족도는 체감되는 것이다. 효용체감의 원칙은 영화라고 예외가 아니다. 사회의 부정적 현실을 다룬 작가주의 영화가 유사한 주제와 소재로 다시 가공 될 때, 창의적인 울림이 없다면, 관객은 금세 반복에 의해 효용이 줄어들게 됨을 느낀다. 이러한 울림과 반향은 당연 감독의 깊은 고민과 성찰의 산물이다. 이돈구감독의 가시꽃은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듯이, 이 영화 또한 주제와 소재 면에서 관객들이 이미 경험해 본 작품들의 외피를 덧입고 있다. ‘울부짖는 자의 구원’이라는 주제 면에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오버랩된다. 또한, 돈크라이마미의 성폭행이라는 소재가 작품의 원재료로 투입된다. 과거 이미 밟고 지나간 길을 다시 걸어간다는 것은 부정적 변동성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이러한 답습은 감독의 새로운 변주에 대한 자신감과, 소재와 주제에 대한 감독의 열정과 집착을 드러낸다. # 처벌방식과 죄의 크기 독립영화의 새로운 피로 주목받고 있는 이돈구감독은 배우를 연상케하는 깔끔하고 말쑥한 외관의 소유자이지만, 이번 그의 작품의
사람의 인상이 좋다고 말할 때, 보통 어떤 조건들이 떠오를까? ‘넓고 훤한 이마, 안광이 살아있는 눈, 살집이 풍부한 코, 단정하고 도톰한 입술, 원만하게 둥근 턱, 귓방울에 살이 붙은 귀’ 관상학에서는 위의 조건들을 보통 좋은 관상이라고 말한다. 관상학이란 사람의 아름다움이나 추함보다, 인상을 관찰하여 사람의 운명을 판단하고자 한다. 입신공명이나 길흉화복을 사람의 인상을 통해서 예측하는 예정론적인 학문인 것이다. 사실과 픽션이 결합된 faction, 영화 관상이 관객들의 기대 속에 개봉되었다. 얼굴이 삼라만상을 지배한다는 관상이 단종시절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이라는 자극적인 배경위에 올라서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운명에 체념하지 않고’ 대적 할 것인가? 아니면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이므로 그 거친 바람을 묵묵히 가슴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계유정난의 역사적 사실은 이에 대한 답을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결말 또한 미리 예측 가능하다. 관상은 시대배경의 자극적 오락성에 빚지면서, 관객들에게 그 바람에 대적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성을 슬프게 읉조린다. 그런 면에서 영화도 생산적인 만족을 창출하는 소비의 대상이 되
낙원이란 어떤 곳일까? 그곳에는 아름다운 초목이 무성하고, 나뭇가지에는 맛 좋은 과일이 달려있다. 맑은 물이 항상 샘 솟고, 온갖 동물과 새가 평화롭게 함께 산다. 고통과 부끄러움이 없는 곳이다. 사진계의 전설, 유진 스미스(William Eugene Smith)는 그의 대표작 낙원으로의 길 ( The Walk to Paradise Garden)에서 동굴 같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탈출로 낙원을 묘사한다. 보도사진잡지 ‘라이프’의 종군기자로 전장을 누비다, 포토에세이스트로 활약한 스미스는 두 아이가 어둠의 끝에서 빛의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장면을 포착한다. 욕망과 불신에서 어린아이 같은 순수와 진실로, 어둠대신 빛으로, 부정을 극복하고 긍정으로, 즉 황야로부터 낙원으로의 길을 이 사진 한 컷에 응축시킨다. 유진 스미스에게 있어 낙원으로의 길은 곧 빛인 것이다. 이 걸작은 그의 고통과 희망에 대한 사유의 산물이 아닌, 그의 실제 삶의 아픔으로부터 건져올린 정수이다. 1945년 5월 22일, 오키나와 전선에서 포탄파편에 부상한 스미스는 다시는 셔터를 누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싸우며 긴 재활치료에 들어간다. 그리고 치료 막바지에, 부상 후 찍은 첫 사진이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