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이고 판단이 명확하던 남성이 어느 날 갑작스러운 감정의 폭풍에 휩싸이거나, 반대로 감정 표현이 무뎌지며 지나치게 이성 중심적인 태도로 돌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상냥했던 여성이 날카로운 언어로 상대를 공격하며 독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며, 역으로 자기 판단에 대한 깊은 불신과 우유부단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반전은 칼 융의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단순한 기분의 변화가 아니라, 남성의 의식 너머에 존재하던 아니마(Anima)와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아니무스(Animus)가 왜곡된 형태로 분출되거나 억압된 심리적 현상으로 이해됩니다.
융은 인간 정신의 본질을 관계와 수용의 원리인 ‘에로스(Eros)’와 질서와 판단의 원리인 ‘로고스(Logos)’라는 두 가지 근원적 축의 역동으로 파악합니다.
모든 인간은 이 양극의 원리를 동시에 품고 태어나지만, 자아는 성장과 사회 적응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어느 한쪽의 원리와 자신을 강하게 동일시하며 정체성을 형성해 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의식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배제된 반대편의 심리 원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층위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상징적 인격의 형태로 구조화되어 숨죽인 채 존재하게 됩니다.
정신의 불균형은 의식이 이러한 무의식의 보완적 작용을 외면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태도를 고수할 때 발생합니다.
구체적으로 배제된 무의식의 원리는 때로 자아를 압도하는 ‘포제션(Possession, 심취)’이나 기능의 결핍을 초래하는 ‘억압(Repression)’의 형태로 표출됩니다. 냉철한 이성이 갑자기 비합리적인 감정에 휘둘리거나 역으로 과도한 냉혹함을 드러내는 것은 각각 이러한 포제션과 억압의 극명한 표현입니다.
결국 융이 제시하는 인격적 성숙이란, 내가 ‘나’라고 믿어왔던 좁은 틀을 넘어 그동안 배제해 온 낯선 무의식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입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창조적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잃어버린 심리적 축을 되찾아가는 ‘통합’의 여정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전체성의 길입니다
◆ 에로스와 로고스: 정신을 구성하는 두 가지 근원적 원리
융은 인간의 정신이 상반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두 가지 심리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 원리는 에로스와 로고스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생물학적 구분을 넘어, 세상을 인지하고 조직하는 두 가지 본질적인 방식입니다.
에로스(Eros)는 관계의 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타인과의 연결, 공감, 감정적 수용, 그리고 직관을 상징합니다. 에로스는 서로 다른 것들을 끌어당겨 관계 맺게 하는 ‘심리적 중력’과 같으며, 논리적인 인과관계보다는 정서적 가치와 맥락을 중시합니다.
로고스(Logos)는 질서의 원리로서, 객관적인 판단, 논리적 구조, 명확한 분별, 그리고 목적을 향한 방향 설정을 대변합니다. 로고스는 혼돈 속에서 질서를 포착하고, 옳고 그름과 타당성을 분별하여 세계를 의미 있는 질서로 구성하는 이성의 힘입니다.
결국 에로스가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로 끌어당기는 힘이라면, 로고스는 혼돈 속에서 질서와 구분을 세우는 ‘구조화의 힘’입니다.
◆심리 기능의 편향: 의식의 일방성과 그 대가
모든 인간은 내면에 이 두 가지 원리를 동시에 품고 태어나지만, 성장 과정과 사회적 적응을 거치며 대개 한쪽 원리에 더 강하게 자신을 투영하는 ‘심리 기능의 편향’을 겪게 됩니다.
자아는 생존과 효율성을 위해 특정 기능을 자신의 주된 도구로 선택합니다. 예를 들어, 전문적인 성취와 경쟁을 중시하는 환경에서는 로고스가 강화되고, 돌봄과 화합을 중시하는 환경에서는 에로스가 강화됩니다.
이렇게 특정 원리에 과도하게 동일시할수록, 그 반대편에 있는 원리는 '내가 아닌 것'으로 부정되어 무의식으로 밀려납니다.
지나치게 로고스 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약점'으로 치부하여 억압하게 되고, 지나치게 에로스 중심적인 사람은 냉철한 판단력을 '비정한 것'으로 여겨 멀리하게 됩니다.
융은 이러한 의식의 일방성이 심해질수록 정신적 전체성이 훼손되며, 억압된 반대 원리가 왜곡된 방식으로 자아를 흔들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 아니마와 아니무스: 배제된 원리가 드러내는 구조적 현상
이러한 에로스와 로고스의 불균형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라는 상징적 형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흔히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각각 ‘남성 내면의 여성성’ 혹은 ‘여성 내면의 남성성’으로 정의되곤 합니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이 개념은 의식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배제해 온 반대편 심리 원리를 가리킵니다. 의식이 특정 방향으로만 조직될 때, 선택되지 않은 다른 심리적 가능성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무의식 속에 구조적 잠재력으로 남아 의식과 긴장 관계를 형성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로고스를 주된 태도로 삼아 논리와 판단, 의지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감정과 관계, 수용과 직관에 해당하는 에로스의 원리는 충분히 의식화되지 못한 채 주변으로 밀려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배제된 심리적 기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심리 구조로 남습니다. 융의 이론에서는 이러한 에로스적 원리가 남성의 무의식에서 ‘아니마’라는 원형적 형태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반대로 에로스를 중심으로 정서적 교류와 관계성을 삶의 핵심 방식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판단과 분별, 구조적 방향 설정을 담당하는 로고스의 기능은 상대적으로 충분히 의식화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소외된 심리적 기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구조로 남아 의식과 긴장 관계를 형성합니다. 융의 이론에서는 이러한 로고스적 원리가 여성의 무의식에서 ‘아니무스’라는 원형적 형태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단순히 ‘내 안의 이질적인 성별’을 뜻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 개념은 의식이 동일시하지 않은 반대 심리 원리와 관련됩니다. 의식이 특정 방향의 심리 기능에만 동일시할 때, 다른 축의 심리적 가능성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무의식 속에 구조적 잠재력으로 남아 상징적 형태로 나타납니다. 융은 이러한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 통합되지 못했을 때
그런데 인간의 정신은 언제나 의식의 통제 아래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의식이 충분히 통합되지 못하면, 그 과정에서 배제된 반대편 원리는 무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때로 강하게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로고스를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에게서는 어느 순간 통제되지 않은 감정의 분출, 관계에 대한 과민한 반응, 비합리적 집착 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에로스를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에게서는 경직된 판단, 독단적 확신, 논쟁적 태도, 타인에 대한 차가운 단절이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기분 변화가 아니라, 의식이 충분히 통합하지 못한 채 반대편 심리 원리가 왜곡된 방식으로 드러난 결과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통합(integration)이란 의식이 무의식에 있는 심리 원리를 자각하고, 그것을 억압하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자아의 성숙한 기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통합되지 못했다’는 것은 의식이 무의식의 원리를 인정하고 성숙한 기능으로 활용하지 못한 채 주변으로 밀어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무의식의 원리는 자아의 통제 안에서 작동하지 못하고, 때로는 무의식에서 갑작스럽게 표면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possession과 repression
이처럼 통합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두 가지 현상, 곧 repression(억압)과 possession(심취)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억압이란 의식이 그 기능을 부정하여 무의식으로 밀어 넣음을 말하며, possession은 억압된 내용이 갑자기 떠올라 자아를 압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왜곡에서 각각 설명될 수 있습니다.
① 아니무스의 왜곡된 발현
융의 고전적 설명에 따르면, 여성의 무의식과 관련하여 로고스적 원리는 아니무스라는 개념으로 설명됩니다. 그런데 아니무스가 성숙하게 의식에 통합되지 못하면, possession 또는 억압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 possession
우선 possession은 무의식 원리의 과잉 활성을 말하는 것으로, 아니무스(로고스)가 무의식에서 강하게 활성화되어 자아와 충분히 분화되지 않은 채 내면에서 “목소리”처럼 밀어 올라간 상태입니다.
이 경우, 현실의 구체적 맥락보다 추상적 확신이나 일반론에 사로잡혀, 의견 절대화, 논쟁적·단정적 태도가 표출됩니다.
이러한 상태에 놓인 여성은 현실의 구체적 맥락에서 벗어나게 되어 타인과의 정서적 연결을 차단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날카로운 비판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는 내면의 로고스 원리가 성숙하게 다듬어지지 못한 채 거친 에너지를 뿜어내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로고스 기능은 “성찰된 이성”이라기보다, 거칠고 경직된 주장으로 나타나기 쉽습니다.
⒝ 억압
반대로 아니무스(로고스)가 위축 억압되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경우, 결핍형 양상이 나타납니다.
즉 자기 판단에 대한 불신, 타인의 권위에 대한 과도한 의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이 표출 될 수 있습니다. 현대적 해석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양상은 미성숙한 로고스 기능의 결핍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결국 포제션형, 결핍형 둘 다 통합되지 못한 아니무스의 왜곡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한쪽은 판단 기능이 자아를 압도한 경우이고, 다른 한쪽은 판단 기능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해 외부에 떠넘겨진 경우입니다.
② 아니마의 왜곡된 발현
이에 대응하여, 아니마 (남성의 무의식과 관련된 에로스적 원리) 역시 성숙하게 의식에 통합되지 못할 경우, possession과 억압이라는 두 가지 왜곡된 양상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 possession
possession 상태에서는 아니마(에로스)가 과잉되고 통제되지 않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때 핵심 문제는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감정이 충분한 성찰과 현실 검증을 거치지 못한 채 자아를 압도하며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는 점입니다.
대표적 특징으로, 감정 기복이 심함, 과도한 감상성, 기분 변화가 급격함, 관계에 지나치게 몰입, 사랑·매혹에 쉽게 휩쓸림, 현실 판단이 감정에 의해 좌우됨, 피해의식, 감정적 반응등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감정에 사로잡힌 남성”으로 설명됩니다.
이런 남성은 겉으로 보면 낭만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성숙한 감정이 아니라 무의식 감정 에너지에 지배된 상태입니다.
특히 왜곡된 아니마에 휩싸인 남성은 특정 인물에게 비현실적인 기대와 환상을 투사하거나 상대를 구원자처럼 이상화했다가, 기대가 어긋나는 순간 극단적인 실망과 냉소로 돌아서는 반복적인 패턴을 보이기도 합니다.
⒝억압
반대로 아니마가 억압되거나 충분히 의식화되지 못한 경우에는, 에로스 기능이 약한 상태입니다. 즉 아니마 미발달은 남성이 감정 세계와 관계성을 의식적으로 발달시키지 못해 감정·관계·공감 기능을 충분히 발달시키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경우, 남성은 감정 표현이 어려움, 공감 능력 부족, 관계 이해 부족, 감정 회피, 지나치게 이성 중심적 태도, 냉정함 또는 감정 둔감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압하고, 관계보다 일이나 논리를 우선하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이런 모습은 건강한 에로스 기능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잉된 감정 몰입인 possession과 정서적 메마름인 억압은 겉으로는 정반대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 바탕에는 공통적으로 통합되지 못한 아니마의 문제가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한쪽은 감정이 자아를 압도해 버린 경우이고, 다른 한쪽은 감정이 의식 안에서 정당한 자리를 부여받지 못한 경우입니다.
◆ 정신의 병리, 그리고 그것의 극복인 통합
① 정신의 병리, 의식과 무의식의 불균형
이처럼 possession과 억압이라는 두 가지 왜곡된 양상은 의식과 무의식 간 불균형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정신의 병리로 설명됩니다. 앞선 분석처럼. 이 정신의 병리에 이르는 과정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결코 의식만으로 완결되지 않습니다. 의식은 자신이 선택한 가치와 태도, 기능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형성해 가지만, 그 과정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반대편 심리 원리를 필연적으로 주변부로 밀어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배제된 심리 원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남아 의식의 빈틈과 편향을 보완하려는 역동적인 힘으로 계속해서 작동합니다.
문제는 의식이 이러한 무의식의 작용을 외면하거나 억압할 때 발생합니다. 의식이 자신과 다른 심리 원리를 끝내 인정하지 못하면, 인간은 결국 한쪽으로 치우친 방식으로만 세계를 해석하게 됩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개인의 삶에서 판단의 경직성, 왜곡된 감정, 그리고 메마른 관계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결국 정신의 병리란 단순히 어떤 기능의 과잉이나 결핍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심리 원리들이 성숙한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발생하는 불균형의 문제입니다.
②억압이 아닌 통합: 낯선 원리를 다루는 살아 있는 능력
이러한 왜곡을 피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억압이 아닌 통합입니다.
여기서 통합이란 무의식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그 존재를 자각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며 이를 성숙한 기능으로 자기 삶 안에 받아들이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즉, 내가 배제해 온 심리 원리를 낯선 타자로 방치하지 않고, 의식의 질서 속에서 다룰 수 있는 살아 있는 능력으로 전환하는 일입니다.
결국 통합(Integration)이란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를 향해 움직이며 하나의 전체성을 이루려는 정신의 본능적인 흐름입니다. 주체는 이러한 내적 경향을 신뢰하고, 그 흐름에 의식적으로 협력하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이를 구체화하면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의 빛 아래로 불러내어 자각하고 그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며, 자기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다시 세우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억압되었던 심리 원리를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길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자각 – 해석 – 경계 설정 – 책임 있는 표현 – 통합’의 과정은 외면해 온 반대편 심리 원리를 의식 안으로 불러들여 삶에 유익한 기능으로 재배치하는 고도의 인격적 작업입니다.
여기서 자각과 해석은 내면의 감정이나 충동을 단순히 없애거나 눌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욕구, 경고, 그리고 가능성을 읽어내는 일입니다.
경계 설정과 표현은 무의식의 에너지가 자아를 압도하지 않도록 적절한 경계를 세우고, 이를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책임 있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어 읽어낸 욕구와 경고를 판단과 관계, 그리고 일상의 행동 질서 속에 조화롭게 다시 배치합니다.
따라서 통합이란 낯설고 불편한 내면을 끝내 ‘적’으로 남겨두지 않는 일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더 넓고 성숙한 자기 자신을 이루는 필수적인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통합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일방적인 편향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전인적 인격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통합이 인격적 성숙의 핵심인 이유입니다. (계속)
■ (참고) 통합의 원리와 성숙한 정치
이러한 통합의 원리는 정치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① 치우친 로고스와 에로스
정치 현장에서 로고스(Logos)는 법치, 정책의 논리, 국가 경영의 효율성으로 나타납니다.
만약 정치권력이 로고스에만 과도하게 치중하면, 이른바 ‘차가운 테크노크라시’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데이터와 수치만으로 국민을 설득하려 하며, 정책의 정당성만을 앞세워 반대 세력을 ‘비논리적’이라고 비난하는 독단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이때 무의식에 배제된 에로스는 대중의 분노나 냉소라는 형태로 폭발하며, 결국 정책은 추진력을 잃고 맙니다.
반대로 에로스(Eros), 즉 관계와 공감에만 치우친 정치는 ‘감성적 포퓰리즘’으로 흐를 위험이 큽니다. 대중의 일시적인 정서에 영합하거나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감정적 선동에 의존하게 되면, 정치는 구체적인 대안과 국가적 방향성을 잃어버립니다. 로고스적 비판이 제거된 정서 중심의 정치는 결국 국가 시스템의 붕괴와 무책임한 자원 배분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②정치적 아니마와 아니무스: 배제된 가치의 역습
실제 정치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역동은 반대 진영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강한 추진력과 논리(로고스)를 앞세운 지도자에게 있어, 소수자의 목소리나 감성적 호소(에로스)는 거추장스럽고 미숙한 ‘아니마’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를 억압할수록 정권은 불통의 이미지에 갇히게 되며, 배제된 가치들은 투쟁과 갈등이라는 인격화된 형상으로 나타나 정권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반대로 통합과 포용(에로스)을 내세우는 세력에게 명확한 법 집행과 질서 확립(로고스)은 냉혹하고 비정한 ‘아니무스’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고스의 원리를 삶의 질서 안으로 수용하지 못한 정치는 결국 무능함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됩니다.
③ 창조적 긴장: 정책의 논리와 소통의 온기를 결합하는 길
결국 정치 현장에서의 성숙은 내가 배제해 온 반대 진영의 논리가 사실은 우리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반대편 심리 원리’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성숙한 정치는 로고스의 선명함과 에로스의 포용력이 긴장 속에서 공존할 때 실현됩니다.
훌륭한 정치는 논리적으로 완벽한 정책(로고스)을 수립하는 동시에, 그 정책이 국민의 삶에 어떤 정서적 영향을 미칠지 공감하고 설득하는 과정(에로스)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이는 반대파의 논리를 ‘제거해야 할 악’이 아니라 ‘보완해야 할 나의 그림자’로 인식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실 정치인이 독단과 혼란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가장 취약하다고 느끼는 기능, 즉 자신이 평소 경시해 온 반대편의 가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공감을 잃지 않고 감정이 방향을 잃지 않는 정치, 그것이 바로 융의 통합 원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정치적 지혜’의 실체입니다.
이러한 통합의 정치는 양극단의 긴장을 견뎌내며 더 넓은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고차원적인 질서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국회의 법사위(법제사법위원회)는 이러한 통합의 지혜를 찾아보기 가장 어려운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래 법사위의 임무는 각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들이 법 체계에 맞는지, 문구는 정확한지 살피는 '문지기' 역할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법안의 생사를 쥐고 흔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차가운 법리와 정파적 계산(로고스)은 섬뜩하게 번뜩이지만, 그 결정이 고단한 국민의 삶에 어떤 상처를 남길지 고민하는 따뜻한 시선(에로스)은 메말라 버렸습니다.
최근의 검찰 개혁이나 사법 관련 논쟁에서도 이러한 불균형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특정 정파의 왜곡된 신념을 정의로 포장해 상대를 밀어붙이는 데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한 복수심에 기반한 검찰개혁이나, 상대를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판옵티콘적 성격의 사법 제도화는 통렬함과 정파적 이익을 얻는 데 승리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민주당 소속 법사위원들은 그 과정에서 정작 국민의 삶을 보듬고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국민의 삶을 담아내야 할 법과 제도는 따뜻한 '그릇'이 아니라, 적을 쓰러뜨려 정파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차가운 '무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정리하면, 에로스가 거세된 채 증오와 복수라는 그림자에 잠식된 로고스는, 이제 정의를 수호하는 이성이 아니라 상대를 섬멸하기 위한 정교한 기술에 불과합니다.
상대를 '함께 살아가야 할 인격적 파트너'가 아닌 '청산해야 할 적'으로만 규정하는 순간, 정치는 인간의 얼굴을 잃고 기계적인 숙청의 장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융적 의미의 정치적 성숙이란 집단의 광기에 편승하지 않는 개성화된 시민과 정치인들이, 서로 다른 원리와 이해를 “적”이 아니라 통합해야 할 전체의 일부로 대하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균형잡힌 법사위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차가운 법리의 칼날 뒤에 가려진 인간적 유대와 공존의 가치, 즉 에로스의 원리를 회복하는 결단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