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몸이 약했던 청년은 약한 몸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초등학교시절 친구와 학교 과제물을 만들 때, 친구는 너무 잘하는데 자신은 과제물을 완성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는 자신 스스로가 바보같고 무능하다는 느낌을 심하게 가졌다.
대학시절에는 마음에 드는 여자친구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가 거절당하는 일이 있자, 그는 ‘나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무가치한 존재인가보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다. ” (김홍애)
이러한 사례처럼, 우리는 과거의 부정적인 사건등으로 인해 수 많은 상처들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거부당함, 자기 연민, 우울, 죄의식, 공포, 슬픔, 열등감, 무가치함등 상한 마음의 올무에 걸리게 되어 그 상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상처받은 마음의 틈새에 사탄이 살며시 스며들어와 그 상처를 더욱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질 경우, 신자일지라도 고장난 턴테이블의 바늘처럼, 무한반복으로 공회전하며 그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즉 수치스러운 상처를 방치하며 더 이상 낫기를 원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이때 마귀는 어느새 우리의 내면을 조종하는 운전자가 되어 버립니다. 내적치유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적치유란 inner self의 치유로서, 과거의 고통스럽고 어두운 기억이나 사건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부터 해방되어, 정상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병에 걸리기 전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상한 마음의 치유의 핵심은 사건의 재조명으로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앞의 사례에서처럼, 사건을 성경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청년의 사건 속에 주님이 개입하십니다. 주님은 쓸쓸히 엎드려 있는 청년에게 다가오셔서 등을 어루만지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So do not fear, for I am with you; do not be dismayed, for I am your God. I will strengthen you and help you; I will uphold you with my righteous right hand.”
이렇게 청년은 주님이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그를 굳세게 하시며, 그를 지탱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품게 됩니다.
그가 이러한 믿음을 품게 된 것은 그의 노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롬8:26에서처럼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그는 최종적으로 상한 마음에 기생하는 사탄의 민낯과 마주대합니다.
그의 낮은 자존감, 거부당함, 우울, 그리고 수치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예수께 넘겨드립니다. 이로 인해 그는 상처가 치유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새생명을 교환받게 됩니다. 즉 죄에 죽고 새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inner self를 주님께 이전하는 것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것입니다. ‘함께 도우심’ 곧 ‘쉬난티람바네타이’의 성령이 자신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그를 옭아매었던 사탄을 그의 내면에서 쫒아내신 것입니다. 불행한 삶으로 이끄는 운전자인 마귀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그의 마음에서 축출하신 것입니다.
이제 사탄은 더 이상 그를 조종할 수 없습니다. 그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자와 독사와 뱀을 발로 밟았기 때문입니다.(눅10:19)
결국 사탄은 무장해제되어 우리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골2:15)
이제 우리는 두 손 높이 ‘우리의 참된 기쁨되신 예수’를 찬양합니다.
「예수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맘의 위로와 활력이시도다
예수는 모든 슬픔을 막아주시니
그는 나의 삶의 능력이요
내 눈의 즐거움과 햇빛이시며
내 혼의 보물과 기쁨이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예수를
맘에 모시고 바라보리라.」
(“Jesu, Joy of Man’s Desiring”, by J.S.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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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탄핵정국 속에서 격동의 시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격동은 과거의 테제와 맞서는 안티테제로서 생산적 의미를 가집니다. 안티테제는 결국 정반합을 거쳐 정상상태의 회복을 돕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변화와 발전, 곧 새로운 균형점은 과거의 균형상태에 모순이 가해질 때만 달성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상상태란 과거 테제의 시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테제를 극복한 것으로 한 단계 상승한 정상적 회복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균형점은 과거의 제도의 옹벽을 부수고 새로운 제도를 세울 때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사람의 의식은 비효율과 부도덕을 제거할 수 없으며, 제도가 생산을 추동하고 사람의 부도덕을 제어한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권력구조에 모순을 가하지 않고, 과거의 시절로 복귀하겠다는 민주당의 탐욕은 고장난 턴테이블의 바늘을 공회전 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과거로의 회귀는 민주당 지도부의 안위와 자신들의 동맹군인 좌파 대중의 풍족한 삶을 고려하는 정파적 포퓰리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대착오적이고 감상적인 좌파 이론에 선을 긋고 있는 국민들은 민주당의 새로운 권력구조 정립에 대한 부작위에 맞서서, 격동의 안티테제의 생산적 의미를 되새기며 종국적으로 새로운 정반합의 권력구조를 스스로 정립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역사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부여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
<참고문헌>
김홍애, 「내적치유의 목회적 적용」, 고신대 석사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