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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일반

납품단가 갈등, 가격분쟁인가 홀드업형 불공정거래인가 [ 홀드업 경제학 ]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원사업자의 도면대로 금형을 짜고, 라인을 바꾸고, 전담 인력을 뽑았습니다. 투자가 끝난 뒤였습니다. 바로 그때 단가 인하 요구가 들어왔습니다.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금형은 다른 곳에서는 같은 가치로 쓰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홀드업의 전형적 구조입니다.

지난 "쌍방독점과 홀드업기사"(https://www.ondolnews.com/news/article.html?no=1576)에서는 엔비디아와 한국 메모리 기업 사이에서 작동하는 쌍방독점형 홀드업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홀드업은 반도체 설계 대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중소기업 공급망에서도 납품단가 갈등, 사후 단가 인하, 단가 조정 요구 포기라는 형태로 홀드업형 구조를 의심하게 하는 정황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관계특수적 투자: 함정은 계약 이전에 놓인다

홀드업이 발생하는 출발점은 계약서가 아니라 그 이전의 투자 결정입니다.

한국 중소기업, 즉 수급사업자는 대기업 원사업자의 규격과 도면에 맞춰 설비, 금형, 인증, 품질관리 체계를 먼저 구축합니다. 이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관계특수적 투자입니다. 특정 원사업자의 생산 시스템에 맞춰 설계된 이 투자는 다른 거래처에는 그대로 활용하기 어렵습니다. 설비는 남지만, 그 설비의 가치는 특정 거래관계 밖에서는 크게 떨어집니다.

문제는 이 투자가 완료되는 순간 힘의 균형이 바뀐다는 점입니다. 투자 전에는 양측이 비교적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투자 후에는 중소기업이 원사업자에게 묶입니다. 전환 비용이 극대화된 시점, 바로 그때 원사업자는 납품단가 인하, 대금 감액, 추가 조건 변경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후 기회주의입니다. 문제는 계약 체결 그 자체보다, 투자 이후의 재협상 국면에서 본격화됩니다.


◆ 요청조차 못 한 절반: 거래단절 공포의 의미

중소벤처기업부 「2024년 기준 중소기업실태조사」에서 수·위탁거래 중소기업이 꼽은 최대 애로 1위는 ‘원자재 가격 상승분 납품단가 미반영’이었습니다. 원가가 올랐는데도 가격을 제대로 올리지 못한다는 것은 수급기업의 가격 조정력이 현실에서 충분히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입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2021년 9월 발표한 「업종별 납품단가 반영 실태조사」에 따르면, 공급원가가 상승했다고 답한 기업 중 45.8%가 납품대금에 비용 상승분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일부 반영은 47.9%, 전부 반영은 6.2%에 그쳤습니다.

특히 납품단가에 비용 상승분을 반영하지 못한 주된 이유로 ‘치열한 가격 경쟁으로 단가 인상 요청 자체가 어렵다’는 응답이 54.7%로 가장 많았고, ‘거래단절 등 불이익 우려’도 22.8%에 달했습니다. 요청하지 못하는 것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것은 다릅니다. 상당수 기업은 단가 조정을 요구하기도 전에 이미 거래 지속 가능성을 먼저 계산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이 수치만으로 관계특수적 투자 이후 사후 기회주의가 발생했다는 인과관계가 직접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원자재 가격 상승분 미반영은 일차적으로 비용 전가 실패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그러나 비용 상승분을 전가하지 못하고, 단가 조정 요구 자체를 포기하는 기업이 많다는 사실은 홀드업이 작동하기 쉬운 거래환경을 보여주는 중요한 정황입니다.


◆ 낙찰 이후에 또 깎는다

보다 노골적인 사후 기회주의의 단서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개별 제재 사건에서 포착됩니다.

최저가 경쟁입찰로 업체를 선정한 뒤, 다시 추가 협상을 벌여 낙찰가보다 낮은 금액으로 하도급대금을 깎은 사례들이 반복적으로 제재 대상이 됐습니다. 낙찰이 이루어진 순간 수급사업자는 계약 체결을 신뢰하고 생산 준비에 착수합니다. 이 시점 이후 원사업자가 다시 단가 인하를 요구했다면, 이는 단순한 최초 가격 협상이 아닙니다. 거래 성사 이후 형성된 수급사업자의 의존성을 이용해 조건을 다시 바꾸는 것입니다.

각 수급사업자가 투입한 전용 설비나 금형의 규모를 엄밀하게 확인하기 전까지 이를 완전한 의미의 홀드업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행위는 홀드업형 불공정거래로 규정할 현실적 근거를 갖습니다. 투자 이후의 의존성, 사후 가격 재협상, 그리고 거절하기 어려운 구조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구조적 순응

결국 한국 중소기업 공급망에서 반복되는 납품단가 갈등은 단순히 “원자재 가격이 올랐는데 납품단가가 오르지 않았다”는 현상만으로 읽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납품단가가 오르지 않은 배경에는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 원사업자가 명시적으로 거절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중소기업이 처음부터 요청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만약 후자라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그 요청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상은 어디서 왔는가.

그 답을 찾으려면 세 가지 흐름을 함께 따져보아야 합니다.

관계특수적 투자가 이루어졌는지, 그 이후 원사업자가 사후적으로 거래조건을 불리하게 조정했는지, 중소기업이 전환 곤란성 때문에 이를 거부하지 못했는지입니다.

이 세 가지가 결합될 때, 납품단가 문제는 단순한 시장 가격 분쟁을 넘어 홀드업형 구조 문제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요청해도 소용없다’는 예상이 반복 학습된 결과라면, 그것은 단순한 심리적 위축이 아닙니다. 관계특수적 투자로 이미 묶인 기업이 과거의 경험과 업계 관행을 통해 체득한 구조적 순응일 수 있습니다.

납품단가 문제의 근본 원인을 따져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가격 그 자체만이 아닙니다. 누가 투자 위험을 부담하고, 누가 사후 협상력을 쥐며, 왜 한쪽은 정당한 가격 조정 요구조차 쉽게 꺼내지 못하는가의 문제입니다. 한국 중소기업 공급망의 납품단가 갈등은 바로 이 지점에서 홀드업형 불공정거래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이 문제는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보수 진영에서도 깊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과제입니다. 공정한 계약 질서와 예측 가능한 거래 관행이 무너지면, 기업의 투자 유인과 공급망의 생산성도 함께 약화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