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의 인간은 두 개의 거대한 중력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는 생존과 경쟁, 성과 압박이 끊임없이 인간을 몰아가는 필연성의 중력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역할·관습·정상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익숙한 자리로 되돌려 앉히는 관성의 중력입니다.
청년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새로운 시작을 접고, 노인은 “이 나이에 뭘 더 하느냐”는 자기검열과 주변의 시선 속에서 시작 자체를 포기한 채 살아갑니다. 그렇게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무엇을 새롭게 시작할 것인가”보다 “주어진 궤도에서 얼마나 무리 없이 버틸 수 있는가”를 먼저 고민하게 됩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중력에 눌려 있는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녀는 인간이 생존의 필연성과 반복의 관성 속에만 머문다면, 세계는 단지 같은 질서를 재생산할 뿐 결코 새로워질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간을 단순히 기능하고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존의 궤도를 끊고 세계 안에 새로운 가능성을 시작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의 능력을 그녀는 “탄생성(Natality)”과 “행위(Ac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가무극 <나빌레라>는 이러한 아렌트의 철학을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치매와 노년이라는 관성 속에 갇힌 76세의 심덕출, 그리고 생계와 미래의 안정이라는 필연성에 짓눌린 23세 발레리노 이채록.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각자의 중력에 균열을 내고, 다시 한 번 세계 안에 ‘처음’을 시작하려 합니다.
◆ 관성과 필연성의 중력에 도전하는 덕출과 채록
일흔여섯,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덕출이 발레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일흔 넘은 노인이 무슨 발레냐”, “다치지 말고 집에서 손주나 봐주는 것이 가족을 돕는 길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덕출의 발레 도전은 바로 그 말들, 곧 세상이 정해놓은 ‘정상성’이라는 관성의 중력에 맞서는 도발입니다.
그가 찾아간 ‘문경국 발레단’에서 만난 인물은 스물셋 발레리노 채록입니다. 한때 촉망받았지만, 부상과 생활고, 성적과 오디션 경쟁 속에서 지쳐버린 청년입니다. 채록은 꿈의 언어보다 생존의 언어에 더 가까워져 있습니다. 그는 현실의 필연성이라는 중력에 눌려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덕출이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채록이 느낀 것은 설렘이 아니라 “내 코가 석 자”라는 현실 감각입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스승과 제자로 연습실에 함께 섭니다.
이처럼 덕출과 채록은 모두 관성과 필연성의 중력에 짓눌린 인물들입니다. 덕출은 노년, 치매, 가족 역할이라는 관성의 무게를 몸에 달고 온 사람입니다. 채록은 부상, 생계, 성과 압박이라는 현실의 필연성에 짓눌린 청년입니다. 처음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짐처럼 느껴졌지만, 두 사람은 발레 바 앞에서 함께 땀을 흘리며 조금씩 각자의 중력을 깨기 시작합니다.
덕출은 “이 나이에 무엇을 더 시작하느냐”는 세상의 정상성이라는 허들을 넘어 새로운 시작을 감행합니다. 채록은 덕출의 늦은 도전을 통해 발레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기술이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처음으로 살아 있게 했던 시작의 자리였음을 떠올립니다.
이야기는 덕출의 치매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그가 채록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순간으로 나아갑니다. 이 공연은 단순한 발표회가 아닙니다. 노년의 관성과 청년의 필연성을 동시에 흔드는 균열의 장면입니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보면, 두 사람은 서로의 말과 행위를 매개로 다시 한 번 ‘처음’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가무극 〈나빌레라〉는 단순한 노년의 도전기도, 청년의 성장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관성과 생존의 필연성이라는 중력 아래 놓인 인간이 어떻게 다시 “처음”을 시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덕출과 채록은 서로를 통해 다시 태어납니다. 덕출은 노년의 관성을 넘어 제2의 탄생을 감행하고, 채록은 생존의 필연성을 넘어 자유로운 행위의 가능성을 회복합니다. 결국 〈나빌레라〉는 인간이 끝내 관성의 궤도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드라마입니다.
◆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아렌트의 탄생성으로 본 <나빌레라>
〈나빌레라〉의 덕출과 채록은 모두 “이미 정해진 인간형” 안에 갇힌 인물들입니다. 덕출은 노년이라는 이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채록은 생계와 상처, 실패의 기억 속에서 “버티는 것 외에는 다른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청년”으로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두 사람을 단순한 결핍과 고정성의 인물로 남겨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덕출과 채록은 서로의 말과 행위, 그리고 함께 쌓아가는 관계를 통해 자기 안에 잠겨 있던 가능성을 다시 발견합니다.
이 점에서 〈나빌레라〉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탄생성의 드라마로 읽을 수 있습니다. 덕출과 채록은 생물학적으로는 이미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서로를 만난 뒤 공적 세계 안에서 다시 한 번 “누구”로 나타납니다. 덕출은 노년이라는 관성을 넘어 발레를 시작하고, 채록은 생존의 필연성을 넘어 발레가 다시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나빌레라〉는 인간이 정해진 역할과 관성의 궤도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덕출과 채록의 변화는 아렌트가 말한 탄생성의 논리, 곧 제2의 탄생, 자유, 유일성, 예측 불가능성, ‘무엇’에서 ‘누구’로의 전환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자신을 드러내고, 무너져가는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Amor Mundi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① 덕출과 채록은 모두 ‘정형화된 인간형’ 안에 갇혀 있습니다
아렌트가 경계한 것은 인간을 하나의 본질이나 유형으로 ‘고정’하는 사고였습니다. 노인은 노인다워야 하고, 청년은 청년다워야 하며, 실패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답게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는 식입니다.
〈나빌레라〉에서 덕출은 바로 그런 시선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노인입니다. 가족에게는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고, 사회적으로는 이미 생의 주요한 가능성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그의 꿈은 현재적 가능성이 아니라 과거의 미련처럼 취급됩니다. 발레를 하고 싶다는 그의 말은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 “늦은 나이의 무리한 욕심”처럼 보입니다.
채록 역시 다른 방식으로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그는 젊지만 자유롭지 않습니다. 청춘이라는 말은 흔히 가능성과 미래를 상징하지만, 채록의 삶에서 청춘은 가능성이 아니라 부담입니다. 그는 생계, 몸의 부상, 자기불신 속에 묶여 있습니다. 발레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순수한 자유의 행위라기보다 버텨내야 하는 과제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덕출은 노년의 관성에 갇혀 있고, 채록은 노동과 생존의 필연성에 갇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 나이에 무엇을 새로 시작하느냐”는 편견에 눌려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의 압박에 눌려 있습니다.
② 덕출의 발레는 노년의 관성을 깨는 ‘제2의 탄생’입니다
아렌트에게 탄생성은 단순한 생물학적 출생이 아닙니다. 인간이 세계 안에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다시 시작하는 능력입니다. 이 점에서 덕출의 발레 도전은 단순한 취미 활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년의 규범을 깨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덕출은 이미 한 번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살았고, 직업인으로 살았으며, 가장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상당 부분 역할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 남편, 할아버지, 은퇴자였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덕출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발레를 시작하는 순간, 덕출은 아렌트적 의미의 제2의 탄생에 들어섭니다.
덕출의 제2의 탄생은 발레를 통해 “늙은 사람”이라는 고정성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덕출이 발레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족과 사회가 부여한 노년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행위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몸으로 보여줍니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시작할 수 있다.” 이때 그의 몸은 단순한 노인의 몸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감행하는 행위자의 몸이 됩니다.
이렇게 그는 더 이상 노년이라는 범주 안에 갇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늦었지만 시작하는 사람, 몸이 쇠약해졌지만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 관습이 정한 시간표를 거부하는 사람, ‘무엇’이 아닌 ‘누구’를 지향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겁니다.
따라서 덕출의 발레는 단순히 꿈을 이루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나이, 관습, 가족의 기대, 사회적 시선이라는 조건 속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③ 자유를 획득한 채록, ‘플리에’에서 ‘그랑쥬떼’로

채록의 문제는 덕출과 다릅니다. 덕출이 노년의 관성에 갇혀 있다면, 채록은 삶의 필연성에 갇혀 있습니다. 아렌트에게 필연성은 주로 생존과 노동의 영역과 관련됩니다. 먹고 살아야 하고, 버텨야 하고, 주어진 현실을 감당해야 하는 압박입니다.
채록은 발레를 하지만, 처음부터 발레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는 인물은 아닙니다. 그는 상처와 분노, 생계의 압박, 실패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움직입니다. 그의 몸은 무대 위에 있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 자유롭지 않습니다. 발레는 그에게 자기표현이라기보다 견뎌야 하는 삶의 일부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덕출과의 만남이 채록을 바꿉니다. 덕출은 채록에게 단순한 제자가 아닙니다. 그는 채록 앞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타난 타자입니다. 늙은 몸으로 발레를 배우겠다는 덕출의 등장은 채록이 가지고 있던 발레의 틀을 흔듭니다. 채록은 덕출을 가르치면서 발레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세계에 드러내는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즉 채록은, 덕출이 몸이 늙고 시간이 지나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을 새롭게 드러내고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자, 발레가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자유의 행위임을 자각합니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자유는 고정화된 세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개시하는 능력입니다. 곧 탄생성을 행위로 꺼내는 힘입니다. 노동과 생존의 필연성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채록은 자유를 통해 다시 오므림에서 도약으로 나아갑니다. ‘플리에’에서 ‘그랑쥬떼’로 비상하는 겁니다.
④ 관계성이 유일성을 드러냅니다
덕출과 채록이 각각 관성과 필연성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곁에 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새로운 시작이 고립된 내면에서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현실화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덕출은 혼자서는 발레를 시작하기 어렵습니다. 그에게는 채록이라는 타자가 필요합니다. 채록은 덕출을 보고, 듣고, 가르치고, 때로는 반발하고, 결국 응답합니다. 그 과정에서 덕출의 발레는 혼자만의 망상이나 늦은 나이의 고집이 아니라, 세계 안에 실제로 나타난 행위가 됩니다. 덕출은 채록 앞에서 말하고 움직이며, 자신이 단순한 노인이 아니라 여전히 시작할 수 있는 “누구”임을 드러냅니다.
반대로 채록 역시 덕출이 없었다면 자기 안의 가능성을 회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덕출은 채록에게 낯선 타자입니다. 그는 채록의 상식으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덕출의 행위는 “노인은 이래야 한다”는 틀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틀을 흔듭니다. 그래서 채록은 덕출을 통해 인간을 다시 보게 됩니다. 발레를 다시 보게 되고, 자기 자신도 다시 보게 됩니다. 덕출의 늦은 시작은 채록의 닫힌 세계를 흔드는 사건이 됩니다.
이것이 관계성의 힘입니다.
아렌트에게 인간의 유일성은 혼자 있을 때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타인 앞에서 말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누구”로 나타납니다. 덕출은 채록 앞에서 다시 태어나고, 채록은 덕출을 통해 다시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공적 세계가 됩니다. 서로의 행위를 보고, 듣고, 반응하고, 응답하는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유일성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나빌레라〉에서 관계성은 단순한 정서적 위로나 세대 간 우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탄생성이 현실화되는 조건입니다. 덕출과 채록은 서로를 통해 관성의 궤도에서 벗어나고, 서로의 존재를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유를 회복합니다.
⑤ 이들의 변화는 예측 불가능합니다
아렌트에게 행위는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합니다. 행위는 고립된 개인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 사이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반응과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한 번 세계 안에 던져지는 순간, 행위자의 의도만으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타인의 응답과 해석, 반발과 지지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덕출이 발레를 시작할 때, 그 결과를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가족은 반대하거나 걱정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의아해합니다. 덕출 자신도 자신의 몸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특히 치매 초기라는 조건은 그의 도전을 더욱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사건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불확실성이 새로운 시작의 증거입니다. 이미 계산 가능한 일, 모두가 예상한 일, 정해진 역할 안에서 반복되는 일이라면 그것은 아렌트가 말한 행위가 아닙니다.
채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덕출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변화 가능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덕출이라는 타자의 등장은 채록의 삶에 예상 밖의 사건을 일으킵니다. 처음에 덕출은 채록에게 부담스럽고 낯선 존재입니다. 그러나 채록은 덕출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보게 됩니다. 발레가 자신에게 무엇이었는지, 왜 춤을 추기 시작했는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되묻게 됩니다. 덕출의 시작이 채록의 시작을 불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한 관계성의 예측 불가능성입니다. 한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에게 건너가고, 타인의 반응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얻습니다. 덕출은 발레를 배우려 했지만, 그 행위는 단순히 덕출 개인의 꿈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채록의 닫힌 세계를 흔들고, 가족의 시선을 바꾸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
따라서 덕출의 발레는 덕출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 속으로 들어간 행위이고, 그 관계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변화를 낳는 사건입니다. 덕출은 채록을 변화시키고, 채록은 다시 덕출의 시작을 가능하게 합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어느 한쪽이 계획한 결과가 아니라, 서로의 말과 행위가 얽히며 만들어낸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세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빌레라〉는 아렌트의 탄생성과 맞닿습니다. 인간의 새로운 시작은 안전하게 계산된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며, 타인의 응답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열립니다. 그러나 바로 그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인간은 관성과 필연성의 반복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덕출과 채록의 변화는 그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⑥ ‘무엇’이 반응을 통해 ‘누구’로 전환됩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것입니다. 덕출은 더 이상 “노인 일반”이 아닙니다. 그는 덕출입니다.
사회는 노인을 자주 기능적으로 봅니다. 보호해야 할 사람, 쉬어야 할 사람, 조심해야 할 사람, 새로운 시작보다는 삶을 정리해야 할 사람으로 봅니다. 그러나 덕출은 발레를 통해 이 일반성을 거부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는 움직입니다. 그는 실패합니다. 그는 다시 시도합니다. 그는 타인의 시선을 견딥니다.
이 과정에서 덕출은 노년이라는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인물로 나타납니다. 그는 “무엇”이 아니라 “누구”가 됩니다. 이것이 아렌트적 의미의 행위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어떤 속성이나 역할로 설명될 때 “무엇”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타인 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자신을 드러낼 때, 그는 비로소 “누구”로 나타납니다.
채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상처 입은 청년”, “생활고에 지친 발레리노”, “불안정한 청춘”이라는 일반적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이처럼 채록은 ‘무엇’의 범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덕출이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채록은 더 이상 고립된 상태로 머물 수 없습니다. 덕출의 엉뚱하면서도 진지한 도전 앞에서 채록은 반응해야 하는 자리에 놓입니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반응입니다. 인간은 고립된 내면에서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말과 행위에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처음 채록의 응답은 거칠고 냉담합니다. 그는 덕출을 비웃고, 밀어내고, 귀찮아합니다. 그러나 이 부정적 응답조차도 채록이 세계와 관계 맺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그는 단순히 무관심한 청년이 아니라, 상처와 냉소로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채록은 덕출에게 반응하는 순간부터 이미 “무엇”의 범주를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채록의 응답은 달라집니다. 그는 덕출의 진심과 끈기를 지켜봅니다. 덕출의 몸을 챙기고, 동작을 다시 보여주고, 함께 무대를 상상합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운 노인 제자였던 덕출이, 어느 순간 채록에게 자기 자신을 다시 보게 하는 타자가 됩니다. 채록은 덕출의 늦은 시작에 응답하면서, 자신이 왜 발레를 시작했는지, 발레가 자신에게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이처럼 채록의 “누구”의 형성은 아렌트가 말한 사이 공간, 곧 in-between에서 드러납니다. 채록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덕출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덕출의 말과 행위가 채록을 부르고, 채록은 그 부름에 응답합니다. 그 응답 속에서 채록은 “불안정한 노동 청년”에서, 타자의 시작을 떠받치며 자기 자신의 시작도 다시 여는 ‘누구’로 변해 갑니다.
⑦ 〈나빌레라〉의 Amor Mundi —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
이 작품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자리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Amor Mundi, 곧 “세계 사랑”입니다. Amor Mundi는 세상이 불완전하고 피로하며 때로는 낯설어도, 이 세계를 함께 살아갈 세계로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한 세계를 지키려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세계 안에서 여전히 누군가가 말하고 행동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공적 공간과 복수성의 자리를 지키려는 결심입니다.
덕출은 늙은 몸과 사라져 가는 기억 속에서도 세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늦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는 탄생성의 가능성을 붙들고, 다시 세계 앞에 나타나려 합니다.
채록 역시 덕출을 통해 세계를 다시 붙듭니다. 그는 처음에는 냉소와 생존의 압박 속에서 자신을 닫아걸 수 있었습니다. 발레를 “먹고사는 기술”로만 여기며, 세계와의 관계를 최소한으로 줄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덕출과의 관계 속에서 그는 다시 응답하기 시작합니다. 덕출의 도약을 준비시키는 손길 속에서, 채록은 자신도 여전히 세계를 향해 말하고 행위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지금 관성과 필연성의 위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미 예정된 궤도, 반복되는 일상, 바꿀 수 없다고 여겨지는 구조 속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삶은 종종 선택이 아니라 순응처럼 보이고, 시작은 사치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덕출과 채록의 새로운 시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세계를 포기하지 말라.’
아렌트가 말하는 Amor Mundi, 곧 세계 사랑이란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는 세계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며 함께 엮어 온 공동의 공적 세계입니다. 이 세계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말과 몸짓에 반응하고, 충돌하고, 설득하고, 함께 변해 갑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단순한 “무엇”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누구”로 빚어집니다.
이때 우리는 숙명처럼 주어진 중력에서 해방됩니다. 발레의 플리에에서 그랑 주떼로 도약하듯, 인간은 관성의 바닥을 딛고 세계를 향해 다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랑, 그리고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시작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태도, 바로 이것이 Amor Mundi입니다. 세계가 피곤하고, 타인의 말과 몸짓이 낯설고, 새로운 시작이 귀찮게 느껴질 때에도, Amor Mundi는 그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그 몸짓에 응답하며, 함께 변해 보려는 결심입니다.
타인의 낯선 몸짓과 말을 비웃지 않는 것. 그 말에 반응하고, 그 몸짓에 응답하는 것. 함께 조금씩 변해 가며 “다시 시작하는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나빌레라〉가 보여주는 세계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Amor Mundi야말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가장 근본적인 덕성입니다.
결국 제도와 효율의 언어가 삶을 규격화하려 할 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서로의 시작을 끝까지 들어주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설 수 있는 공적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책임입니다. 인간다움은 바로 그곳에서 보존됩니다.
Initium ut esset, creatus est homo.
시작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창조되었다.
※
공연 : < 나빌레라> / 가무극 : 140분/
2026.05.2~2026.05. 17(일)/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05.23 밀양아리랑아트센터
06.06 대구학생문화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