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성노예) ② ] 일본군 조선인 위안부가 매춘부? (2016 3 22기사)

  • 등록 2017.12.28 00: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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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와 우익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논리의 하나로 매춘패러다임을 내걸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들은 해외에서 일하는 창기인 ‘가라유키상’의 일종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돈벌이를 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일본군 위안부들은 성노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2007년 6월 14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더 팩츠’라는 제목의 글에 이러한 주장이 펼쳐진다. “일본군에 편입된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가를 받은 흔하디 흔한 공창제도에서 일하던 여성들이었다. 위안부 대부분을 영관급 장교보다 훨씬 수입이 많았으며 위안부의 대우는 양호했다는 증언도 많다.”

정말 그럴까?


◆ 성노예란?

성노예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노예는 상품과 다름없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로서, 소유자의 통제에 놓이게 되된다. 그러므로 노예의 노동과 행동은 자유의사와는 무관하게 소유자의 강압에 의해 결정된다. 

대표적인 노예의 예가 상품노예이다. 1787년 노예를 실은 배가 항로를 이탈하여 선박의 물이 부족하게 되자, 선주는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후 선주는 노예를 잃은 것에 대해 보험금을 청구한다. 즉 노예는 화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오승진)

최근 노예의 정의는 상품노예의 개념을 넘어, 소유권과 통제권의 개념을 뜻한다. 1926년 「노예제금지협약」에서  “노예제는 소유권에 속하는 권한의 일부 혹은 전부가 그 사람에게 행사되어지는 그러한 사람의 지위 또는 조건”으로 정의된다. (조정현) 즉 노예제를 규정하는 핵심은 소유권한의 행사, 통제권한 행사이다. 

노예화의 판단 요소를 좀 더 살펴보자. 통제권한이 행사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자기 결정권이 제한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자기결정권 박탈이란 물리적으로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뿐만 아니라 강력한 심리적인 구속을 당하는 경우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를 혹은 아내가 남편을 일거수일투족 감시 통제한다면, 감시당하는 쪽은 곧 노예이다. 사람들은 가끔 이러한 구속과 통제를 사랑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성노예의 판단 근거는 무엇일까?  국제재판소에서 노예화로 기소한 이유가 이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구유고국제형사재판소(ICTY)의 포카(Foca)사건이 그 예이다.  보스니아의 포카 지역에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휘관들은 보스니아계 이슬람 여성들에 대하여 행한 사건으로 기소되었다.  감금, 성적학대가 기소의  이유였다. 

또한  ICTY는 노예화 여부를 판단하는 요소로 “이동의 자유에 대한 통제, 물리적 환경의 통제, 심리적 통제, 도망을 방지하는 조치, 배타적 지배를 위한 힘의 사용, 잔혹한 대우, 性과 노동에 대한 착취 및 통제”등을 들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은 상품노예처럼 극단적인 소유권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에게 행사된 통제는 관습국제법상 인도에 반하는 범죄인 노예화에 해당한다고 하였다.(오승진)


◆일본군 조선인 위안부 = 성노예 

노예화를 일본군 위안부에 적용해 보자. 강제수단에 의한 징집, 감시 하 이송, 나아가 위안소에서의 감금, ‘性 노동’에 의한 자기 결정권의 결여, ‘성 노동’의 중단에 대한 자유의 박탈등이 성노예와 관련한 자기결정권의 박탈에 속할 수 있다.  

위안부의 자기결정권의 박탈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살펴보자. 

먼저 징집은 강제징집과 취업사기가 주를 이루어, 본인의 의사에 반한 강제연행이었다.    

고노 담화에 밝혀진 것처럼 관헌이 직접 징집에 가담하거나, 군에 의해 선별된 징집업자가 부상병 간호· 여공 모집등의 미끼를 던지고 농촌 여성들을 유혹하였다.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미리 받고, 이에 대한 대가로 상이군인을 간호하게 된다는 감언에 속아 종군위안부가 된 사례도 있었다.(강만길) 자유결정권이 상실된  성노예가 된 것이다.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감금과 강제로 특징 지워진다. 

군인들에게 ‘위안’을 제공하는데 있어, 군 위안부는 신체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윤명숙) 군위안부는 하루 최저 15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하고 공휴일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군 위안부는 외출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이들은 거의 감금상태였다. (강만길)  군기밀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군위안부의 위안소 외출이 엄중 단속된 것이다. 군 통제의 위안소 설치도  군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군위안부의 산책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구역으로만 산책할 수 있었다.  외출은 병참장교의 허가 없이는 지정장소를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위안소는 위안부들을 집단적으로 감금해두고 군인들의 폭행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군위안부의 실태는 참혹하였다.(윤명숙)  

허약해진 여성은 감금하고 식사도 제공하지 않았다. 성병을 치료할 수 없는 여성은 군인이 끌고 가 산에 버렸다.(이옥분 증언) 도망친 여성이 끌려 돌아오기도 하고 군인에게 폭행당하기도 하였다.(김순덕 증언) 술 마신 군위안부는 경영자가 군에 통고하여 군인이 구타하였다.(이순옥 증언). 투신자살 미수로 부상당하는 경우고 있었다.(문옥주 본인 경험 증언) 정신이상으로 입원하기도 하였다.(임금아 본인경험 증언)

이러한 잔혹한 대우와 ‘노동’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진 위안소는 성노예화에 해당되었다.   

또한 위안부들은 최 일선 전투에서 ‘전사’하기도 하였다. 일본군들은 전투가 개시되면 위안부들을 임시 간호부로 이용하다, 퇴각하면서 위안부들이 들어 있는 참호에 수류탄을 던지고 도망갔다. 위안부들이 포로가 되어 군사 비밀이 누설될 것을 막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강만길)

그렇다고 위안부들은 ‘노동’에 대한 보수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군인들은 위안소를 이용하기 위해 군표를 구입하여 위안부에 주어야 한다. 하지만 군표는 경영자가 회수하였다. 경영자는 전쟁이 끝나면 돈을 지급하겠다고 설명하였으나 경영자는 군인 수를 장부에 기재만 할 뿐이었다.(김복동증언) 

“아침마다 표 계산을 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난 계산을 하거나 말거나 표만 갖다 주고 왔다. 하루에 한 번씩 정산을 했는데, 주인을 우리에게 돈을 조금 주고 나머지 돈은 저금했다고 했지만 얼마나 저금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는 증언도 있다.(강만길)

그렇다고 급여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경영자를 두고 형식은 매춘업이나, 그 이익은 경영자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한 위안부는 “우리 여자들은 돈을 받지 않았다. 위안소는 산 속에 있었는데 돈을 쓸데도 없었고 쓸 일 도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강만길) 

이처럼 ‘노동’으로 번 돈은 업주가 저금등으로 보관하였으나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게 되자 무일푼으로 귀국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강만길)

결국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는 위안소에서 실질적으로 감금되었고, 결과적으로 무보수 인 채로 노동하다, 병으로 죽거나 전세가 악화되어 전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본우익들은 위안부를 자발적으로 돈을 버는 자라 불렀지만, 그들의 실상은 자기결정권이 박탈된 성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출신 위안부 VS 조선출신 위안부

일본 우익과  정부의 일부 관료들이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닌 가라유키상이라 강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주장의 일부는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는 출신국 별로 구분되었다. 즉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 출신 위안부와 식민지 출신 위안부로 나눌 수 있다. 

일본 출신 위안부는 일본 우익들의 주장처럼 본의의 의사에 따라 돈을 벌기위해 종군위안부가 된 경우였다.  

이들은 21세 이상의 성인 중 매춘 경험이 있는 자가 지원하였고, 종전 후에 빚을 갚고도 상당한 돈을 모은 이도 있었다. 

일본인 위안부는 이를 증언하고 있다.(오노자와) 1925년 태어난 야마우치 게이코는 만 10세에 가난으로 동경의 게이샤 포주에게 300엔의 전차금을 받고 팔려간다. 그녀는 게이샤 친구로부터 남양의 전선 기지에서 일하면 포주에게서 빌린 돈인 전차금을 갚아준다는 말을 듣는다. 게다가 ‘나라를 위하는 일’이며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 된다’는 말에 위안부로 지원하였다.  

1942년 3월, 추크섬과 토노와스섬에 건너간 그녀는 현지에서 장교 위안부가 되었고, 귀국할 때 1만엔 이나 되는 돈을 벌었다. 하지만 전후 인플레이션으로 번 돈의 가치가 없어졌다.  

반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징집과정에서 본인의사에 반하여 위안소로 끌려간 경우이다. 

관헌· 군의 강제연행과  군과 연계된 징집업자들의 취업사기로 징집된 것이다. 게다가  매춘 경험과 성경험이 없는 미성년자들이 위안부에 다수 섞여 있었다. 

또한 여성들이 군의 허가 없이 자유의사로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처럼 폭력과 사기로 징집되어 감금된 상태에서 ‘노동’을 그만 둘 자유조차 빼앗겼다. 

그러므로 일본출신 위안부와 조선출신 위안부는 위안부가 되는 배경, 노동의 강도, 노동의  대가등이  달랐다. 전자는 매춘부이나, 후자는 성노예인 것이다. 


◆ 일본 출신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징집의 모습을 달리한 이유

이렇게 일본 출신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징집의 모습을 달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에는  미성년자 강제 징집, 취업사기가 왜 이렇게 성행했을까?

이는 일본정부가 일본 내의 불법 위안부 모집을 강력히 통제하였으나 식민지에는 예외를 두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인신매매, 유괴(기만, 유혹등을 이용), 약취(폭행, 협박등을 사용)등을 단속하기 위해, 1938년 내무성 통첩과 육군성 통첩을 시달한다. 이 통첩들은 일본에는 나왔으나 식민지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1937년 말부터 일본 각지에서 군위안부 징집에 있어 유괴와 약취가 성행하자, 내무성과 육군성은 이 문제가 사회질서를 어지럽게 할 뿐만 아니라 국제법을 위배한다는 사실에 주의하였다.  

여기서 국제법은 일본이 1921년 가입한 「부인 및 아동의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을 말한다.  

이 조약은 21세미만의 여성에게는 본인의 승낙이 있어도 성매매를 권유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또한 21세 이상의 여성에게 사기 및 강제의 수단으로 성매매를 권유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일본에서의 유괴· 약취· 21세 미만에 대한 징집을  엄격히 통제하여 위안부 징집이 국제법을 어기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내무성은 1938년 2월 증명서 없이 유괴 약취로 징집하는 업자들을 단속하도록 각 현에 지시를 내리고, 중국으로 도항하는 접객부를 21세 이상의 매춘 경험자로 제한하였다. 

내무성 통첩이 나온 며칠 후, 3월에 육군성 통첩이 일본에 시달되었다. 징집업자들의 인선이 적절하지 못해 유괴가 벌어지고 있어, 각 파견군의 통제 감독 아래 징집인 선정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동시에 징집업자는 각 징집지역의 경찰 및 헌병과 긴밀히 협력해 나가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내무성과 육군성의 이러한 통첩들은 조선에는 시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징집에 엄격한 제한을 둔 반면, 조선등의 식민지에는 징집에 유괴 약취의 제한이 없었다. 

이렇게 양성의 통첩이 조선에 적용되지 않은 배경은 조선이 국제법 예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21년 조약에 가입 시, 유보조항으로 식민지를 조약 적용 제외 지역으로 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아 조선은 취업사기, 강제 연행, 미성년자 징집등이 난무하는 최적의 징집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일본출신 위안부는 자유의지에 의해 해외매춘을 하는 가라유키상인 반면, 조선출신 위안부는 사기와 강제 징집, 미성년자 징집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위안부가 된 경우이다. 그러므로 일본군 조선 위안부는 자유의지로 돈 벌기 위해 상행위를 하는 매춘부가 아니었다.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피해자의 울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의 성격이 성노예인 점에 비추어, 위안부라는 용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오승진)

위안부는 가해자 입장에서의 표현이어서 피해자입장에서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제법의 적용을 위한 법적인 개념으로 성노예라는 표현과 위안부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또한 일본이 지난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해도 불구하고 고노회담 계승을 부인하는 발언을 지속한다면, 국제법 위반에 대한 추궁의 필요성 검토도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군 성노예에 어떠한 국제법이 적용될 수 있을까? 

먼저 일본군 위안부는  인도에 반하는 죄가 적용될 수 있다. 즉 이는  “전쟁전 또는 전쟁 중에 민간인에 대한 살인, 절멸, 노예적 혹사, 추방, 기타의 비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근거한 박해행위”를 말한다.  

일본군 위안부(성노예)와 관련된 국제법으로 헤이그의 육전조약(1926)위반이 있다. 일본은 1912년 이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조약의 46조는 국제관습법으로 점령지에서 “집안의 명예와 권리, 개인의 생명, 사유재산”등을 존중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1907년 헤이그 협약 규정에도 “가족의 명예와 권리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의 조항이 있다. 또한  동 조약은 “여성의 명예에 대한 여하한 공격 특히  강제 매춘등 여하한 형태의 외설적 공격으로부터 여성을 특별히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조례 제6조 c항, 그리고 연합국 통제 위원회법 제10호, 그리고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 조례 제5조도 노예화를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성노예)는 국제노동기구 ILO협약 29호, 즉 강제노동금지규약에도 위배될 수 있다. 

일본은 1932년 이 협약에 비준하였다. ILO 협약 권고 적용에 관한 전문가 위원회는 수차례(1996, 1997, 2001~2005,2007)에 걸쳐 일본의 ILO 강제노동협약 위반여부에 대해 개별 사안별 검토의견서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성노예)제도가 제 29호 협약이 금지되는 강제노동행위이며, 따라서 이러한 일본의 행위는 ILO강제노동협약상 의무의 명백한 위반이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하였다. (조정현)

이어 일본은 1925년에 비준한 1904년의 ‘醜業을 행하기 위한 여성매매규제 협정’, 1910년 ‘추업을 행하기 위한 부녀매매금지협정’, 1921년 ‘여성과 아동의 매매금지조약’을 위반하였다.

특히 강제노동조약과 추업조약을 일본이 위반 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는 일본사법부의 판결도 나와 있다. 

이 재판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으로,  1991년 12월 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최초의 소송이다. 2003년 7월 2심판결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입법의 필요성을 명시하고 일본 국가의 행위와 책임을 인정하였다. (김관원) 

일본군 위안부 실태에 대해 “노예상태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가 있었다고 추인할 수가 있다.”고 재판부는 인정하였다. 하지만 개인보상의무는 없다고 하였다. 

재판부는 “강제노동조약 및 추업조약에 위반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피항소인에게는 이런 조약상의 의무위반에 따른 국제법상 국가책임의 해제 방법으로서 일본 국내의 보상입법을 하는 것도 하나의 시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단 이는 국회의 재량에 속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일본 사법부의 판단처럼 국가적 책임을 인정하는 입법 정책적 해결방안을 모색하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불신과 울분을 누그러뜨려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관원)


<참고 문헌>
윤명숙, 최민순 옮김 (2015),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오승진(2013), “국제법상 노예제의 금지-위안부와 관련하여”
도시환(2015),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법적 과제”
조정현(2014),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국제법적 검토”,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
김관원(2015),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대한 일고”, 동북아역사재단
오노자와 아키네(2014),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공창제도”, 「그들은 왜 일본군 위안부를 공격하는가」
강만길(2008),  “일본군 위안부의 개념과 호칭문제”, 「한국민족운동사론」 

조성규기자 ondol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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