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스더의 결단: 스스로 만든 안전장치를 해제
에스더 4장의 핵심은 하나님의 ABI(Ability, Benevolence, Integrity: 능력·선의·신실하심)를 근거로 자신의 안전장치를 내려놓고 위험을 자발적으로 감수하는 믿음입니다. (관련기사 : "참된 믿음" https://www.ondolnews.com/news/article.html?no=1455)
우리는 나만의 자기확신으로 성벽을 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A)과 선의(B), 그리고 신실하심(I)을 온전히 신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 만든 안전장치와 자기 확신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불확실과 불투명의 위험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ABI 성품은 가장 견고한 ‘믿음의 방패’가 되어 우리를 흔드는 사탄의 모든 불화살을 막아내고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이다”와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 유사한 태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는 에스더의 결단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초기 걸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의 태도를 닮았습니다.
파반느(pavane)는 16~17세기 유럽(특히 스페인·프랑스) 궁정에서 유행한 느리고 장중한 행렬 춤입니다. 이 춤은 행렬(procession)처럼 보이지만, 본래는 장례 행렬이 아니라 궁정 무도회나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우아한 춤이었습니다. 그 ‘걸음’은 상실을 과장하지 않고 품위 있게 견디는 자세를 만들어냅니다.
이런 점에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죽음을 애도하는 곡이라기보다는, 상실을 품위 있게 견디는 자세를 담아낸 음악적 그림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왕녀'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과거의 이상화된 이미지, 사라져버린 우아함, 혹은 특정 시대(스페인의 벨라스케스 시대)에 대한 향수(Nostalgia)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곡은 슬픔의 감정(Pathos)보다는, 사라진 아름다움에 대한 차분하고 절제된 '추억(Remembrance)'을 음악적으로 그려낸 것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이러한 '절제된 추억'의 태도는 앞서 언급한 에스더의 비장한 고백과 다시 한번 깊은 내면의 층위에서 만납니다. 에스더서의 "죽으면 죽으리이다(If I perish, I perish)"는 단순한 체념이 아닌 숭고한 결단의 문장입니다. 이는 결과를 통제하려는 손을 놓고, 위험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의탁의 태도입니다.
파반느가 상실을 눈물로 적시는 대신 우아한 춤으로 승화시켰듯, 에스더 또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대신 자신의 운명을 더 큰 뜻에 맡기는 '품위 있는 걸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결국 두 이야기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앞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자세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ABI 성품에 기대어 '나만의 편협한 확실성'의 틀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원대한 불확실성'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때, 우리는 비로소 두려움 없이 그 상황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제목이 주는 선입견과 달리, 이 곡은 죽음의 비극을 노래하는 곡이 아닙니다. 1899년 피아노곡으로 작곡되어 1910년 관현악으로 재탄생한 이 곡은, ‘슬픔을 다루는 태도’가 얼마나 우아할 수 있는지를 음악적 구조를 통해 증명합니다.
①리듬의 미학: 통곡 대신 선택한 ‘우아한 걸음’
이 곡의 핵심은 제목인 ‘파반느(Pavane)’에 있습니다.
앞선 설명처럼, 파반느는 16~17세기 유럽 궁정의 의식에서 사용된 느리고 장중한 2박자 계열의 춤곡입니다. 라벨은 이 형식을 빌려 4/4박자의 규칙적인 리듬(강-약-약, 강-약-약)을 곡 전체에 깔아두었습니다.
왼손 반주가 이 엄격한 리듬을 유지하는 동안, 오른손의 선율은 자유롭게 그 위를 부유합니다. 이는 마치 화려한 예복을 입고 궁정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는 귀족의 걸음걸이를 연상시킵니다.
라벨이 “이 곡을 너무 느리게 연주하지 말라”고 당부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질척이는 슬픔으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인 보폭을 유지하며 기품 있게 나아가는 행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②화성의 마법: 오픈 5도 = 속이 빈 화음
조성은 사장조(G Major)를 기반으로 하지만, 라벨은 여기에 인상주의적 색채를 덧입혔습니다.
인상주의적 색채란, 마치 물감이 은은하게 번진 수채화나 안개 낀 풍경화처럼 소리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법입니다. 딱딱한 법칙보다는 순간의 빛과 색감, 그리고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전통적인 화성에 7화음, 9화음, 그리고 비화성음(Added notes)을 빈번하게 사용하여 소리의 끝을 몽환적으로 흐려놓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선명한 원색 물감에 흰색을 섞어 파스텔 톤을 만들거나, 사진에 필터를 씌워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도-미-솔'처럼 딱 떨어지는 명확한 소리 대신, 그 사이사이에 묘한 음들을 덧붙여(비화성음) 소리의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뭉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음악이 뚜렷한 주장을 하기보다, 안개 속에 있는 듯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여운을 남기게 됩니다.
특히 이 곡의 묘한 분위기를 만드는 결정적 장치는 저음부에서 자주 들리는 ‘속이 빈 화음(Open fifths)’입니다.
오픈 5도란 이렇습니다. 보통 우리가 듣는 꽉 찬 화음은 ‘도-미-솔’처럼 세 개의 음이 어우러집니다. 여기서 가운데 있는 ‘미’(3도)는 소리에 색깔을 입혀 밝거나 슬픈 느낌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알맹이입니다. 그런데 라벨은 이 가운데 알맹이를 쏙 빼버리고 ‘도’와 ‘솔’만 남겨두었습니다.
가구가 꽉 채워진 방이 아늑한 감정을 준다면, 가구가 다 빠진 텅 빈 대리석 홀은 공허하고 서늘한 느낌을 줍니다. 라벨은 바로 이 ‘속의 빈 소리’를 통해,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아득한 거리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왕녀에 대한 그리움을 감정적으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옛날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담백하고 신비로운 태도를 소리로 구현한 것입니다.
③선율과 색채: 절제를 통한 승화
곡은 전형적인 3부 형식(A-B-A'), 즉 "익숙한 멜로디(A) → 새로운 변화(B) → 다시 돌아온 멜로디(A')"의 흐름을 따릅니다. 관현악 버전에서 호른(French Horn)이 연주하는 A섹션의 첫 주제 8마디 선율은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감정을 쥐어짜는 도약이나 기교 없이, 담담하게 상승했다가 하강하는 선율선은 마치 기도문처럼 들립니다.
중간부(B)에서 잠시 단조의 색채가 드리우며 감정이 고조되지만, 이내 다시 차분한 주제(A')로 돌아와 부드럽게 소멸합니다. 플루트, 오보에, 하프가 만들어내는 투명한 음색은 ‘사라진 세계에 대한 향수(Nostalgia)’를 극대화합니다.
④ ‘나만의 편협한 확실성’의 틀을 깨뜨려, ‘하나님의 원대한 불확실성’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때의 담백함
결국 이 곡의 음악적 위대함은 ‘과잉의 부재’에 있습니다. 라벨은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소리를 키우거나 템포를 흔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엄격한 박자와 투명한 화성이라는 ‘형식의 갑옷’을 입혀, 슬픔조차 기품 있는 춤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여기서 ‘엄격한 박자’란 슬픔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또박또박 걷는 의연함을 뜻합니다. 또한 ‘투명한 화성’은 앞서 설명한 ‘속이 빈 화음(오픈 5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라벨이 화음에서 감정의 알맹이를 빼내어 소리의 무게를 덜어냈듯이, 우리도 슬픔 앞에서 감정에 함몰되지 않고 마음을 투명하고 가볍게 유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슬픔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투명하고 단단하게 지키는 태도를 음악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우리가 묵상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을 취약성에 노출시키는 상황에서의 태도’와 맞닿아 있습니다.
자신의 확신의 성벽을 허물어 나타난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 앞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태도는 라벨의 파반드의 태도와 유사합니다. 핵심적인 알맹이를 빼내어 ‘도’와 ‘솔’만 남겨두었지만, 그 속의 빈 소리는 오히려 담백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ABI 성품에 기대어 ‘나만의 편협한 확실성’의 틀을 깨뜨려, ‘하나님의 원대한 불확실성’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때, 우리는 두려움의 비명을 지르는 대신 라벨의 파반느처럼 담담하고 우아한 믿음의 리듬을 타고 그 상황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