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믿어(I trust you).“
이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과연 상대방의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이는 신뢰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직결됩니다.
여기서 신뢰의 근거는 일반적인 통념과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중고차 거래가 그 예입니다.
우리가 오랜 친구에게 차를 살 때 느끼는 '일반적 신뢰'는 친구라는 관계에 기반하여 "설마 친구인 나에게 결함이 있는 차(레몬차)를 팔아 역선택의 위험에 빠뜨리겠어?"라는 기대입니다.
반면,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의 신뢰는 다릅니다. 이러한 신뢰는 단순히 친구의 선의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제공하는 차량 점검 데이터와 정비 이력을 통해 객관적인 상태를 확인하고, 그 정보의 투명성과 전문성에 기반하여 상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반적 신뢰는 상대방의 도덕성(선의)만 있어도 형성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심리학적 신뢰는 상대방의 도덕성(선의)에 더해 실력(능력)과 정직성이 모두 충족될 때 비로소 성립합니다.
◆클라이머와 빌레이어의 사례
① 상황
이러한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극한의 상황입니다. 로프 하나에 생명을 맡겨야 하는 클라이머와 빌레이어의 관계가 그 예입니다.
가파른 암벽을 오르는 클라이머 A와 그 아래에서 생명줄인 로프를 쥐고 있는 빌레이어(belayer) B가 있습니다. 빌레이어란 등반자가 추락할 때 로프를 잡아주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안전을 확보하고, 등반이 끝난 후에는 안전하게 내려주는 역할을 하는 파트너를 뜻합니다.
A가 발을 헛디뎌 추락할 경우, 그의 생사는 전적으로 B가 로프를 얼마나 단단히 잡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B는 A와 10년 지기 절친으로, 누구보다 착하고 순박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겁이 많고 운동 신경이 둔하며, 결정적으로 집중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② 두 가지 신뢰의 대립 :일반적 신뢰와 사회심리학적 신뢰
이 상황에서 A가 B에게 느끼는 신뢰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엇갈리게 됩니다.
일반적 신뢰의 관점에서 A는 "B가 나를 해칠 마음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때 신뢰의 근거는 B의 '인성(Character)'과 '선의'입니다. A는 B의 도덕성과 지난 10년의 우정을 근거로 "B는 내 친구야. 절대로 고의로 줄을 놓거나 끊을 놈이 아니야"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인성과 선의에 기초해서 A는 B와 식사를 하거나 돈을 빌려주는 등 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반면, 사회심리학적 신뢰의 관점에서는 "B는 나의 추락을 막을 수 있는가?"가 핵심 질문이 됩니다.
여기서 신뢰는 단순히 선의만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능력(Ability)', '선의(Benevolence)', '진실성(Integrity)'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해야 합니다. 능력이 있어도 악의가 있다면 위험하고, 선의가 있어도 능력이 부족하면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는 B의 부족한 운동 신경(능력 결여)과 산만한 태도(진실성/일관성 부족)를 알기에 "B가 딴짓을 하거나, 내가 떨어질 때 당황해서 줄을 놓칠 수도 있어"라고 우려합니다.
결국 A는 B의 선의를 믿더라도, 위기에 대처할 능력과 끝까지 원칙을 지킬 진실성(책임감)을 확신할 수 없기에 자신의 생명(로프)을 B에게 맡기고 암벽을 오르는 위험 감수 행동은 할 수 없게 됩니다.
◆신뢰의 근거
결국 두 신뢰는 무엇을 근거로 성립하는가에 따라 그 깊이와 행동 양식이 달라집니다.
① 일반적 신뢰의 근거: "선의(Benevolence)에 대한 믿음“
A가 B를 '일반적으로' 신뢰할 때 작동하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기제는 바로 B의 '선한 의도(Goodwill)'입니다. 이는 "B는 결코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즉 '악의의 부재'에 대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상식적으로 10년 지기 친구인 B가 앙심을 품고 로프를 자르거나, 추락하는 A를 방치할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볼 때 이 믿음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합니다. B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위기 상황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는 '능력자'임을 증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의 하나만으로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을 감수할 근거로서 불충분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② 사회심리학의 신뢰의 근거: "능력(Ability)과 진실성(Integrity)의 검증“
A가 로프를 B에게 맡기는 행위(위험 감수)를 하기 위해서는 선의 외에 두 가지 근거가 더 필요합니다.
•능력(Ability): B가 갑작스러운 추락 충격을 버틸 근력이 있는가?
•진실성(Integrity): B가 딴청을 피우지 않고 끝까지 원칙을 지킬 책임감이 있는가? (일관성, 정직성)
특히 여기서 선의(Benevolence)와 진실성(Integrity)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선의(Benevolence)는 "나를 아끼는 마음(태도)" 신뢰자(나)에게 이익을 주거나 잘해주고 싶은 구체적인 의도입니다. 이는 관계 지향적인 속성으로, "내 친구니까 구하고 싶다"는 우정이나 애정에 해당합니다.
이에 대해 진실성(Integrity)은 "원칙을 지키는 힘(성품)" 그 사람이 일련의 원칙을 가지고 있으며, 상황이 바뀌어도 그 원칙을 고수한다는 믿음입니다. 이는 원칙 지향적인 속성으로, "무섭더라도 줄을 놓지 않는다"는 책임감이나 평소의 일관성에 해당합니다.
결론적으로 B가 아무리 선의(나를 돕고 싶은 마음)를 가진 '착한 사람'일지라도, 덜렁거리는 성격 탓에 진실성(원칙을 지키는 일관성)이 결여된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로프를 놓칠 수 있습니다. 또한 B가 선의와 진실성을 모두 갖추었다 해도, 신체적으로 약해 버틸 능력이 부족하다면 마찬가지로 사고를 막을 수 없습니다.
즉, 신뢰의 3요소(능력·Ability, 선의·Benevolence, 진실성·Integrity)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된다면, A는 로프를 맡기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게 됩니다.
◆ 성경적 믿음: 하나님은 완벽한 빌레이어 (The Perfect Belayer)
앞선 로프의 사례에서 나타난 신뢰 모델을 성경 관점의 '믿음(Faith)'에 대입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앞서 살펴본 친구 B는 선의는 있었지만 능력과 진실성이 부족해 신뢰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반면,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은 신뢰의 3요소(ABI)를 완벽하게 충족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성품을 지니고 계십니다.
① 하나님의 속성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ABI, Ability- Benevolence- Integrity를 모두 갖추신 존재이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지전능하심(Omnipotence)'을 지니셨습니다. 따라서 친구 B처럼 팔 힘이 부족해 로프를 놓치는 일은 결코 없으며, 우리의 생명을 끝까지 지탱할 수 있는 완벽한 능력(Ability)을 갖추고 계십니다.
둘째, '선의(Benevolence)'는 나에게 이익을 주려는 선한 의도를 의미인데, 이는 독생자를 내어주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Love & Grace)'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에 결코 무심하지 않으시며 항상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셋째, '진실성(Integrity)'은 원칙을 고수하는 일관된 성품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한 번 맺은 약속(언약)을 영원히 준수하시는 '신실하심(Faithfulness)'을 통해 거짓 없고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② 믿음이란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인 신뢰의 3요소에 근거해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 스스로 위험에 노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발적 취약성이 믿음입니다.
스스로 위험에 노출하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기 희생적이고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삶의 자세이자 행동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는 확신 때문에 '나의 안전장치와 계획이 무너져도 상관없다'고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나의 안전장치와 계획이 무너져도 상관없다'는 신앙적 고백은, 신뢰의 세 가지 요소에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위험 노출'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자기 안정성 포기: '능력'에 대한 응답
하나님의 첫 번째 신뢰 속성인 '능력/유능함(Competence)'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곧 자기 통제의 포기로 나타납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미리 세운 계획이라는 안전장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능력이 이끄시는 방식과 결과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게 됩니다.
예상치 못한 결과나 비효율적인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에 그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것입니다.
⒝불확실성 감수: '성실함'에 대한 헌신
두 번째 속성인 '성실함/신실함(Integrity/Faithfulness)'은 신앙인이 미래의 불확실성에 뛰어드는 행위를 요구합니다. 당장 눈앞에 안정성을 보장하는 증거가 부족하더라도, 과거와 미래에 걸쳐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약속(말씀)만을 유일한 근거로 삼아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논리나 눈에 보이는 이익에 기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만을 믿는 모험적인 헌신입니다.
⒞ 손해 감수: '선한 의도'에 대한 순종
마지막 속성인 '선한 의도/호의(Benevolence)'를 믿는다는 것은 상황적 손해를 감수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신앙인은 현세적인 이익, 안전, 평판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한 뜻을 따르기 위해 기꺼이 불편함이나 고난을 받아들입니다. 이는 자신의 평안을 확보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시는 궁극적인 호의와 사랑이 더 크고 중요함을 인정하기에 가능한 자기 희생적인 위험 노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에서 '스스로 위험에 노출하는 것'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입증하는 필수적인 행동이라고 해석됩니다.
결국 믿음이란 하나님의 신뢰 속성 (능력, 성실함, 선한 의도)에 근거해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 스스로 위험에 노출하는 것으로, '나의 안전장치와 계획이 무너져도 상관없다'는 자발적 취약성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에서 말하는 '위험 노출'은 무모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뢰의 3요소(능력, 성실함, 선한 의도)에 대한 철저한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결단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일반적 신뢰 vs 진정한 신뢰
성경은 '단순한 앎'과 '구원 얻는 믿음'을 철저히 구분합니다.
①일반적 신뢰 (지적 동의)
성경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참된 믿음이 아님을 경고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 "You believe that there is one God. Good! Even the demons believe that—and shudder. (NIV)" (야고보서 2:19).
이 구절에서 귀신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이 유일신이라는 신학적 사실(Fact)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압도적인 능력을 알기에 공포에 질려 떨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구원받는 믿음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그분께 '순종'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서 말한 일반적 신뢰, 즉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지만 내 삶의 안전장치(로프)를 그분께 맡기지는 않는 상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②진정한 믿음 :에스더의 결단- ABI에 근거한 실천적 신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추상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Ability), 선의(Benevolence), 신실하심(Integrity)을 근거로, 내 삶의 안전장치를 그분께 맡겨 스스로 위험에 자신을 놓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에스더의 이야기는 이 신뢰의 메커니즘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상황: 안전지대가 사라진 위기
유대인 몰살이라는 위기 앞에서 에스더의 왕후라는 신분은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침묵하지 말고 행동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는 에스더에게 자신의 위치가 단순한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도구임을 자각하게 합니
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스더 4:14, 개역개정)
"For if you remain silent at this time, relief and deliverance for the Jews will arise from another place, but you and your father’s family will perish. And who knows but that you have come to your royal position for such a time as this?" (Esther 4:14, NIV)
⒝신뢰의 근거: 하나님의 ABI 확인
왕의 부름 없이 나아가면 죽는다는 현실적인 법규 앞에서, 에스더는 3일간의 금식을 통해 자신의 신뢰 대상을 하나님으로 재설정합니다. 그녀가 붙잡은 로프는 하나님의 성품(ABI)이었습니다.
•Ability (능력): 죽음의 상황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입니다.
•Benevolence (선의): 자기 백성을 위기에서 건지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신뢰함입니다.
•Integrity (신실하심): 언약 맺은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함입니다.
⒞ 행동: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의 결단은 감정적인 호소가 아니라, 위에서 확인한 하나님의 ABI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선택입니다. 그녀는 결과를 자신이 통제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이양했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스더 4:16, 개역개정)
"Go, gather together all the Jews who are in Susa and fast for me. Do not eat or drink for three days, night or day. I and my attendants will fast as you do. When this is done, I will go to the king, even though it is against the law. And if I perish, I perish." (Esther 4:16, NIV)
◆에스더의 결단
에스더의 결단은 단순히 “위기 속에서 안전을 포기하고 용감하게 나서라”는 도덕적 훈계가 아닙니다.
이 결단의 동인(動因)은 네 가지 주요 요소를 통해 전개됩니다.
첫째, 믿음은 ABI에 근거합니다.
에스더의 위험 감수는 무모한 도박이 아닙니다. 그녀는 왕의 변덕과 제국의 법이 절대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Ability(능력), Benevolence(선의), Integrity(신실하심)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분이시며,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선한 뜻을 가지셨으며,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이 ABI가 없으면 에스더의 결단은 그저 자살 행위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뢰는 감정이 아니라, 이렇게 근거 있는 판단에서 출발합니다.
둘째, 그 믿음은 자발적 위험 노출로 표현됩니다.
에스더는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3일 금식을 통해 오히려 통제력을 더 내려놓고, 규례를 어기며 왕 앞에 섭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말은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목숨—을 완전히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이는 신뢰가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안전장치를 하나씩 벗어던질 때 비로소 신뢰는 ‘일반적 신뢰’를 넘어 ‘믿음’의 영역에 들어섭니다.
여기서 안전장치란 왕후라는 지위, 유대인 정체를 숨기고 침묵하는 합리적인 생존 전략 등의 세속적 안전장치와 결과를 스스로 통제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성품(AIB)을 기대하고 자신의 안전장치를 버리고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킬 때, 믿음이 형성됩니다.
셋째, 그 위험 노출은 공동체를 살리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에스더의 결단은 개인적 영웅담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안전을 대리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유대 민족 전체의 생존을 겁니다. 한 사람의 취약성 노출이 공동체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이는 신앙이 “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사적 종교로 축소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믿음은 항상 공동체적 차원을 향합니다. 에스더는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예표하는 ‘대리적 희생의 모델’로 읽힙니다.
넷째, 섭리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역사 속에 나타납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그 속에서 섭리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모르드개가 말했듯이 “구원은 다른 곳에서 일어날 수도 있지만”(에 4:14), 동시에 에스더의 순종이 없으면 그녀와 그녀의 집은 멸망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을 강제로 정해 놓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섭리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순종할 때, 그 순종을 통로 삼아 세상 속에서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참된 믿음 - if I perish, I perish.
에스더 4장의 핵심은 ‘위험 감수’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신뢰할 때(로프를 연결할 때), 그 대상이 나를 지탱해 줄 능력(A)과 선의(B)와 신실함(I)이 있다고 판단되면 나의 무게를 상대에게 싣고 위험을 감수합니다.
마찬가지로 에스더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대신, 확실한 하나님의 성품(ABI)에 삶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고백하며 위험을 기꺼이 감수합니다.
오늘날처럼 안전이 강조되는 시대에도, 이 선언은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줍니다.
참된 신뢰는 로프를 쥐고 있는 상태에서는 발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로프를 내려놓고, 취약성을 노출하며,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당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이다”와 같은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의 지혜, 능력, 그리고 미리 계획된 안전장치와 자기 확신에 대한 모든 의지를 포기하는 자발적 위험노출이며, 이는 온전히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는 데 기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