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환성을 지른다. 거울의 모습과 자신이 같다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이 아이는 또한 거울의 모습처럼 엄마를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오인한다. 그래서 아이와 엄마 사이에는 틈새가 없다.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는 엄마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충만을 느낀다.그런데, 이 아이는 커 가면서 깨닫는다. 거울 앞의 모습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이를 아는 시점은 엄마와 아이 사이의 틈새를 발견하는 시점이다.이 틈새는 보통 다른 대상이 끼어들어 생긴다. 아이의 눈에 그 대상은 자신과 엄마 사이를 방해 놓는 훼방꾼이다. 이 갈라진 틈은 혼돈이다. 엄마와의 동일로 인한 완벽한 세계가 깨지는 아픔이다. 동시에 이는 참을 수 없는 분노이다.이 분리의 상실이 커지면 광기로 변한다. 동일시로부터의 분리는 파괴이다.△이 결핍은 새로운 결합의 욕망을 가져온다. 이 틈새를 메우기 위해 계속 다른 대상과 결합하려 한다. 이 빈자리를 인정, 돈, 권력, 학문, 성등이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러한 화려한 대상들로부터 욕구가 충족되어도, 어느 무엇도 과거 아이와 엄마와의 상상의 합일로 인한 충만은 안겨주지 못한다. 그래서 욕망은 무한하게 되고 이 결핍은 지속적
지난 대선 기간에 야당의 한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이란 슬로건을 내걸어 유권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 적이 있다. 다소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 표현은 사실 우리 서민들의 희망이며 꿈꾸는 이상이다.무엇보다 기간제 근로자, 단시간 근로자, 비전형 근로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비정규직근로자에게 이러한 ‘저녁이 있는 삶’은 한낱 신기루일 뿐이다.그들은 노동유연화라는 사용자측의 정책에 따라, 언제 해고당할지 모를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다. 특히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들어오는 비정규직 직원, 협력업체직원이 원청업체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직원, 심지어 파견업체를 거쳐 협력업체에 소속된 후 다시 원청업체에 근무하는 비정규직등은 감원대상의 일순위로, 정규직 직원들의 무시와 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이들은 근로계약을 체결하여도 계약기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기간의 정함이 형식에 불과하다는 사정이 인정되는 경우, 계약서의 문언에도 불구하고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맺었다고 보기 때문이다.이처럼 사용주의 일방적 계약해지 및 해고와 비인간적인 차별이 원청업체에 근무하는 파견업체나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실정이다.◆비정규직
사랑스런 눈망울의 여섯 살 남자 아이가 잔디에 누워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12년의 시간은 흘러, 이 아이는 18세의 대학생 신입생이 되어 미래의 순간들과의 새로운 만남을 기다린다.이렇게 12년간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인되는 순간의 조각들이 결합되어, 165분의 기억에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영화가 만들어졌다.관객은 격정의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고, 우리도 경험해 보았을 일상의 순간들과 담담히 조응한다. 그리고 지난 순간들의 소중함을 담백하게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메이슨은 상처를 받고 실연을 당하며, 불안과 실망의 혼돈에 휩싸인다. 하지만 따뜻한 위로의 순간들이 그를 감싼다. 그렇게 메이슨은 앞으로 다가 올 또 다른 순간들을 기꺼이 맞이하는 어른이 되어 간다.◆ 성장12년은 메이슨에겐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의 시간이다.그의 12년간의 시간의 여행을 165분에 담아 낸 이 영화는 링클레이터 감독이 같은 배우들과 12년간 매년 15분씩의 영상을 만들어 완성되었다.이 인고의 시간들은 작품에 거짓 없는 진솔함을 품게 한다. 메이슨의 목소리는 낮고 굵어져 가고, 메이슨의 엄마도 허리가 두터워진다. 또한 아빠의 이마 주름은 깊어져 간다.진실된 삶의 여정
발음조차 힘든, 그래서 마치 대중들이 그들을 기억해 주기를 거부하는 듯한 록밴드 ‘soronprfbs’의 매니저 Don은 이 밴드의 키보드연주자가 바다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고자하는 광경과 우연히 마주친 Jon에게 제안한다. “당신 C음(도),F음(파) 그리고 G음(솔) 연주할 수 있나요?”히트곡을 작곡하여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를 꿈꾸는 Jon은 이 엉뚱하고 어설픈 제안을 뜻밖의 기회로 받아들인다. 그 이후 호숫가 외딴 집에서 11개월간 밴드의 새 앨범 녹음에 참여하게 된다. 게다가 빈곤에 허덕이는 이 밴드의 재정적 후원자로 나서기까지 한다.이 영화는 감미로운 음악들에 빚진 진부한 로맨틱 사랑이야기가 펼쳐지는 음악영화가 아니다.기괴하고 특이한 음악밴드의 좌충우돌 스토리로 보일 수도 있고, 평범하지만 음악을 통해 명성을 얻고자하는 평범한 한 인간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기발한 괴짜 천재의 세상과의 단절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하 스포일러 있음)▶ 존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스토리를 끌고 가는 화자인, 음악에 비범하지 못한 Jon의 자아각성 성장스토리로 느낄 수 있다. 그는 심지어 샤워를 할 때도 큰 수박크기의 호박모양 가면을 쓰고 있는 괴짜 천재
갯벌 위로 짱뚱어가 펄쩍 뛰어오른다. 집게발을 흔들며 게가 옆걸음으로 엉금엉금 뻘밭을 헤친다. 그 진흙 깊숙이 꼬막이 숨죽여 숨어있다.갯벌 저편에 백로가 한껏 순백의 정갈의 자태를 뽐낸다. 오리들은 흔들리는 물결을 따라 모든 시름 내려놓은 듯 흔들흔들 유유히 헤엄쳐 간다. 갯벌은 바람에 순응하여 고개를 숙이는 갈대를 키우고 있다. 바람의 리듬에 따라 황금빛 갈대들이 흥겨이 군무를 춘다.동네 아낙들은 가슴 위로 차오르는 물속을 유유히 유영하며, 하늘이 그녀들에게 허락한 몫만을 받겠다는 듯, 하루의 양식을 위해 물고기를 낚는다.한없이 한가롭고, 정겨운 이곳.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그곳. 욕망과 다툼 대신 하늘의 이치를 받아들이는 이 脫俗의 공간은 바로 順天만이다.△순천만의 사계의 풍광을 과장 없는 카메라에 담담히 담아낸 이홍기 감독의 순천은 무진기행에서 타협의 일상에서 벗어나 자아를 깨닫게 하는 상상의 도시 ‘무진’을 연상하게 한다.순천은 갈등과 욕망을 어깨에 짊어지고 힘겹게 걸어 나가는 현대인들에게 공존과 섭리의 진리를 강요 없이 흡수하도록 이끈다.△이 영화는 단지 자연으로의 회귀만을 말하지 않는다. 順天은 하늘에 순응함은 운명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생명을
억압의 애급을 떠나 가나안 땅을 찾아 나선 이스라엘 민족처럼, 죠드 가족은 수대에 걸쳐 경작해 왔던 오클라호마의 고향 땅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희망의 땅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죠드 가족은 산업화와 대공황으로 그들의 땅을 빼앗기고, ‘포도’로 실컷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할아버지의 꿈이 실현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고물트럭을 타고 떠난다.하지만 풍요와 희망의 상징인 ‘포도’를 수확하는 대신, 그들은 그들이 부딪치는 비참한 현실 앞에 ‘분노’하게 된다.▣ 분노(wrath)당시의 시대 상황은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농업의 기계화로 노동이 자본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산업구조의 변화의 상징인 트랙터는 소작농들을 대대로 내려 온 자신들의 땅에서 몰아내었다. 한대가 수십 명의 노동자를 대체한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산업의 변화 즉 구조적 실업만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었다. 산업의 지배구조도 변화되었다. 트랙터 위에는 지주 대리인이 있으며, 이의 위에는 대지주 혹은 토지회사가 자리하고 있고, 그리고 이 피라미드의 최상층부에는 은행이 위치하고 있었다. 결국 정점을 중심으로 연쇄적인 지배구조의 사슬이 노동자를 그들의 땅에서 축출한 것이다.그 결과 자신의 토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반복의 전략으로 설명된다. 일부의 평자들은 주제의 반복과 구성의 반복으로 영화가 결국 무의미로 종착된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별것 없는 동어반복에 파블로프의 실험처럼 관객들은 훈련된 결과 그의 작품에 열광한다는 비판도 나온다.홍상수 감독의 신작 자유의 언덕에서도 예의 반복이 내러티브 구성, 형식, 주제 등에서 동원된다. 우선 기존의 고착화된 얼개를 차용한 것은 전작들과 다름없다. 이번 영화에도 ‘남자가 여행을 떠난다. →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섹스로 이어진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라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모리가 권을 찾아 서울 계동 북촌 게스트하우스에 머문다. 그런데 자유의 언덕이라는 카페에서 카페여주인 영선을 만난다. 이후 같은 숙소에서 사는 상원과 술을 마신다. 그리고 영선과 섹스를 한다. 결국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자유의 언덕의 형식도 감독의 장기인 인과관계의 혼돈으로 관객들의 내러티브의 정렬의 시도에 장애를 가한다. 원인 이후 결과라는 선입선출의 질서를 무시하고, 결과를 던지고 원인을 살며시 제시하는 배열의 뒤섞임을 추구한다. 또한 비루하며 무책임한 남자가 삼각관계에 휘말리고, 섹스 후 다시 다음날 제정
“엄마 아빠 죄송해요. 그 아이가 같이 게임을 키우자며 협박을 하더라고요. 게임에 쓴다고 제 통장의 돈까지 가져갔고, 담배도 피우게 하고 오만 심부름과 숙제를 시켰어요. ...... 피아노 의자에 엎드리게 한 뒤 손을 묶어놓고 무차별적으로 저를 구타했어요.”중학교 2학년의 꽃다운 아이가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너무나도 짧은 삶을 끝내고, 생의 마지막 글을 이처럼 남겼다.신체폭력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죽음으로 이 괴물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을까? 노예처럼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하는 셔틀에 영혼은 얼마나 멍이 들었을까?매점에서 빵을 대신 사다 주는 빵셔틀, 담배를 사다 주는 담배셔틀, 숙제를 대신 해주는 숙제셔틀에서 스마트폰 테더링 셔틀, 친구 스타킹에 구멍이 났을 때 자신의 스타킹을 벗어주는 스타킹셔틀까지... 한 인간을 굴욕의 낭떠러지로 내던지는 이러한 야만의 폭력 앞에 우리 아이들이 망가지고 마음에 피를 흘리고 있다.괴물이 된 가해자 학생들의 약자들에 대한 이러한 폭력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었다.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강자가 존재감을 인정받고 생존을 유지한다. 폭력의 그룹에는 협동과 질서가 유지되고 그들의 그룹 밖의 소수를
영화의 시작은 긴장된 표정의 군인들이 전투지역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군가를 부르고 있다.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리려는 듯 군가를 부르고 있다. “It could be tomorrow, or it coule be today/When the sky takes the soul/ the earth takes the clay.”혹시 영화관을 잘 못 찾은 건 아닐까? 활기와 유머 넘치는 러브 로맨스 뮤지컬의 공식을 상상한 탓에, 이처럼 어둠과 두려움이 드리워진 전쟁영화의 장면과 로맨스뮤지컬의 사이에 쉽사리 연결핀을 놓지 못했다.하지만 이 프롤로그는 이 영화의 백미이며, 플롯의 전개를 암시하는 압축된 표현이다. 그래서 이 도입부는 낯설지만 신선하다.◆ 살아있는 생생한 러브스토리데이비와 알리는 아프가니스탄의 죽음의 전장에서 무사히 고향 에든버러로 돌아와 빛나고 활기찬 에든버러 거리를 걷는다. 알리는 데이비의 여동생 리즈와 결혼하여 안정된 관계를 맺고자 한다. 데이비는 간호사 리즈의 소개로 잉글랜드 출신 동료 이본과 사랑에 빠진다. 데이비의 부모는 25년의 결혼생활에도 여전히 서로를 믿고 사랑한다.하지만 이러한 관계들은 데이비의 부모의 25주년 파티에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앞날의 고민으로 주눅 들고 시들어 있는 청춘들과 달리, 세상이 뭐라 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복학생 만섭은 없어진 족구장을 다시 만들어 달라고 총장에게 건의를 하는 등, 열정과 피 끓는 패기로 충만하다.만섭은 캠퍼스 퀸 안나의 남자친구이자 전 축구 국가대표선수인 강민을 족구시합에서 누른다. 설욕을 벼르는 강민과 만섭은 학교 족구대회에서 다시 맞선다.족구왕은 러시아 목각인형 마트료시카를 떠올리게 한다. 인형에 작은 인형이, 그 작은 인형 속에 더 작은 인형이 들어 있는 이 겹 인형처럼, 족구왕도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의 몇 겹을 벗겨야 비로소 그 정체를 드러낸다.◆ 한 겹그 첫 겹은 애정의 삼각 관계이다. 여느 청춘들과 달리 때 묻지 않은 만섭의 순수에 이끌린 안나는 만섭에 관심을 보이고, 만섭과 강민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족구 시합을 벌인다. 학점2.1에 토익은 받아 본 적 없으나, 열정으로 가득 찬 파격 복학생 만섭과 전직 국가대표 축구선수 강민 중 누가 공인 캠퍼스 퀸 안나를 쟁취할 지, 에필로그까지 팽팽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두 겹하지만 이러한 러브 라인은 어쩐지 상투적이고 밋밋하다. 그래서 다시 한 겹을 벗겨본다. 그러자 청춘의 방황하고 좌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