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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잘 살기 (well being)① ] ‘잘살기’는 제도적 개선으로부터, 시민이 정치공동체를 선택할 수 있어야

-에우다이모니아, 잘 살기, 그리고 세 가지 종류의 삶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일까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행복을 ‘좋은 삶’으로 정의 내렸습니다.  여기서 좋은 삶이란 주관적인 만족을 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공적가치를 담보하고 있는 삶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특정한 삶으로 인해 행복을 느낀다고 하여도, 공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삶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상습적인 음주가 주관적인 만족을 준다하여도, 알콜 중독의 삶은 공적으로 행복한 삶으로 평가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행복은 주관적 느낌과 객관적 공적 가치를 함께 갖추어야 하는 좋은 삶을 의미하였습니다.



◆ 에우다이모니아, 잘 살기, 그리고 세 가지 종류의 삶



고대 그리스인의 행복한 좋은 삶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로 정의됩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열거한  삶의 세 가지 종류의 검토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쾌락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 삶, 그리고 철학적 혹은 관조적 삶을 영위합니다.


먼저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감각을 추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는 감각적으로 즐기는 진정한 삶은 파괴적인 모습을 띠고 있지 않는 중용의 삶을 말하였습니다.


쾌락의 향유가 다른 존재의 잠재력을 파괴한다면, 이는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타인의 자원을 전용하여 소모시키는 행위는 정당한 감각적 향유로 판단 받지 못하였습니다.


또 감각적인 향유는 탐욕과도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부를 축적하여 먹고 소비하는 감각적인 삶은 주관적인 행복을 높이는 이성적인 행동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지나쳐 탐닉으로 빠져든다면 이는 행복 아닌 구토로 전환된다는 지적입니다.


두 번째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삶을 강조합니다. 이는 개인의 명예를 추구하는 삶을 넘어, 덕을 목적으로 하는 삶을 말합니다.


덕을 추구하는 정치적 삶이란 타인과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삶을 말하였습니다.


정치적 삶은 중용에 의해 획득되는 행복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용이란 일률적으로 양극단의 산술적인 중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쾌락과 고통은 과도하게 혹은 과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어느 경우에나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사람들에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중용인 동시에 최선인 것이다.”라며 “과도함과 부족함은 실패이고, 반면 중용은 칭찬받고 일종의 성공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중용은  불의에 저항해야 하는 상황에서 과도한 분노의 폭발 혹은 복종을 배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정의를 갈망하는 시민의 촛불 집회는 ‘차분한 분노’에 걸 맞는 시민의 정치적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공감해야 하는 상황에서  지나친 관심 혹은 외면도 중용에서 벗어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각적인 소비를 위해 아낌없이 소비하지만 소외된 이웃을 위한 얼마간의 기부에 스크루지처럼 인색하다면, 이러한 개인은 중용의 행복한 정치적 삶과 거리가 멀다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하는 철학적 삶을 최고의 행복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부여된 형상에 조응하는 삶에 참여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는 참된 행복을 최고의 선이라 규정하고, 이는 순수관조에 의해 실현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일반적으로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일시적인 것인 감각의 탐닉에 빠져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탓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마음을 권력, 재물, 명예 등에 중용을 넘어서 지나치게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용의 마음으로 상황을 숙고하고 사유하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고해의 바다에 던져진 인간이 잘 살기 위한 길은 중용의 마음으로 깊이 사유하고 삶의 진리를 통찰하는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지나치거나 냉담하지 않는 중용을 지키며,  사색의 여유를 갖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는 필요요소라는 분석입니다.


결국 행복이라 불리는 에우다이모니아는 잘 행동함, 잘 살아감(well being)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감각적 탐닉을 넘지 않는 감각적 향유, 상황에 따른 중용의 정치적 삶, 그리고 깊은 사유와 관조의 삶이 '잘 살기'를  가져오는 요소가 됩니다.



◆‘잘살기’는 제도적 개선으로부터, 시민이 정치공동체를 선택할 수 있어야


에오다이모니아는  중용의 실천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중용을 지키는 사람은 먼저 숙고하고 사유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숙고는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행복을 숙고하는 이들은 정치적 구조의 변화에 민감합니다.  ‘잘 살기’ 위해선 이를 뒷받침해주는 민주주의가 요구되고,  민주주의는  건강한 정치적 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정점은 헌법입니다.


헌법은 정치체제의 운영의 근본원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본적 인권, 경제적 자유와 민주화, 지방분권, 대의제에서 의원을 결정하는 방식, 정부의 구성 형태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헌법이 규정하는 사항들은 결국 민주주의를 꽃피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헌법의 민주주의 규정들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을 때, 우리의 ‘잘살기’는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경제적 자유 뿐만 아니라 경제의 민주화가 이루어 질 때, 국가의 의사결정이 중앙에 집중되지 않고 지방으로 분산되어 있을 때, 대의제에서 득표율과 의석수가 일치를 보일 때, 행정부가 지속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대통령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지 않을 때, 유권자들은 행복을 실현하기 쉬운 제도적 토양을 제공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잘살기’ 위한 제도적 토양에 대한 숙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깊은 사려에 근거하여 제도의 변화를 위한 실천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는 ‘잘살기’는 ‘국민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국민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정치적 삶과  관조하는 삶에 근거하고 있는 만큼, 국민들은 어떤 정치공동체에서 살아야 하는지, 혹은 자신이 속해 있는 정치공동체를 어떤 공동체로 만들어야 하는 지등의 문제를 숙고하고 실천적인 대안을 생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근간인 바람직한 헌법을 공적인 영역에서 공론화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그리 과격한 요구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였듯이, 현대의 국민들도 ‘잘살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헌법의 틀을 숙고하는 시민 공론화 작업은 국민들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각 정당들이 이해득실에  매몰되어,  제도개선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이를 타개할 수 있는 현명한 길은 시민이 적극적으로 정치적 삶을  전개하는 시민의 공론화 작업과  바람직한 정치 공동체의 선택입니다.


2018년은 시민이 정치적 삶, 숙고하는 관조의 삶에 적극 동참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