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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최저임금제도] 최저임금보전은 국민혈세의 낭비?

-마그리트의 골콘다를 떠올리게 하는 현수막
-최저임금 보전 사례는 사회주의와 대한민국만?
-시장만능주의, 시장유토피아 VS 정부개입, 공동체주의
-노동은 상품인가?
-최저임금제도 – 아름다운 공동체를 향하여



사람들은 현실에서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꿈에서 공중을 떠돕니다.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이와 같은 우리의 환상을 ‘골콘다 (Golconda)’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검정코트에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공중을 떠돌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신사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엇갈리게 하고 있습니다.


마그리트는 골콘다에서  경쟁사회의 삭막함을 말하고자 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골콘다는 원래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었던 인도의 부유한 도시를 말하는데요,  ‘富’의 은유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림에서처럼 사람들은  땅에 발을 붙이지 않고 부와 신분상승을 쫓아 허공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세상의 희소한 부와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는 서로 돕고 살아가는 연대의 고리가 끊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경쟁사회에서 사람들 간에 시선이 엇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존의 욕구와 땅 위를 날고자 하는  환상이 공동체의 유대를 단지 환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마그리트의 골콘다를 떠올리게 하는 현수막




요즘 여의도 국회 정문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자유한국당에서 걸어 놓은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띄입니다.  


그런데 그 문구가 마그리트의 골콘다의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문구엔 ‘최저임금 대책 없이 올려놓고 국민혈세 2018년 3조, 2022년까지 10조, 2050년까지 322조’라고 적혀있는데요,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이 허투루 쓰이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현수막에서 ‘국민혈세 2018년 3조’등은  내년 최저임금이 인상되면서 정부가 중소 영세업체 사업주에게 인건비조로 지원하는 지원금을 말합니다.


현수막의 의미는 한국당이 최저임금 보전에 쓰이는 세금투입을 비판하면서  내후년 이후의 최저임금인상에  제동을 걸겠다는 의도로 읽힙니다.


현수막은 세금을 통한 최저임금 보전을 공동체 구성원간의 유대로 인식하기 보다 개인의 이익을 감소시키는 정책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마그리트의 골콘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최저임금 보전 사례는 사회주의와 대한민국만?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도 지난 달  대구에서 “세금으로 민간 기업 임금을 보존하는 것은 사회주의외에 대한민국뿐이다.”라며 “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무너지고 있다.”고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보전을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홍대표의 주장은 안타깝게도 사실이 아닙니다. 프랑스에서 관련 사례를 찾을 수 있어서입니다.


프랑스는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월정 최저임금보전을 법제화했습니다. 근로시간 단축은 최저임금 시간급 변동이 없어도 노동자의 월 급여가 줄어들게 됩니다.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오브리 1차법 제22조(최저임금보장)에서 “본 협정의 적용을 받아 근로시간이 단축되는 근로자는 3년의 소정기간 동안 특별 수당을 지급받게 된다. 이 특별수당은 최저임금의 유지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별 수당 지급의 조건은 노사동수 조정위원회가 99년 1/4분기중 정하게 된다 ”라고 명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최저임금 보전 사례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 프랑스에서도 발견됩니다.



◆ 시장만능주의, 시장유토피아 VS 정부개입, 공동체주의


세금으로 민간기업의 임금을 보전해서는 안 된다는 홍대표의 주장은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됩니다.


이는 시장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시장만능주의, 시장유토피아라는 경제철학을 전제하고 있는 논리입니다.


시장유토피아론은  각 개인은 자유롭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개인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서로 경쟁하게 된다고 전제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로운 이익의 추구를 위해  시장의 가격기구가  자원의 배분을 전적으로 맡게 됩니다.  이는 시장이 자기 조절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장유토피아론자들은 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자유의 폐지, ‘노예의 길’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시장의 자기조절적 기능이야 말로 완전히 유토피아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거대한 전환>에서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폴라니의 지적은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제대로 적용되었습니다.  2008년 미국 3위의 투자은행인 메릴린치가 BOA (Bank of America)에 인수되고 미국의 제 4위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한 이후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파급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완전경쟁 시장을 유도하고 자원배분의 최적화를 이끌 것이라는 시장만능주의는 대자본가들의 탐욕으로 얼룩지게 된 것이지요.


결국 시장에게 모든 것을 맡겨라는 말은 경쟁에서 승리한 대자본가에게 모든 경제의사결정을 맡겨라는 말과 등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장의 신화가 맥없이 허물어지는 지점에서 시장 실패의 대안으로 국가의 개입이 등장하게 됩니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여  최적의 자원 배분을 추구한다는 주장에 대해, 경제성 이외의 가치로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적 가치가 강조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는 이중운동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폴라니는 지적합니다.


폴라니가 지적한 이중운동은 자기조정 시장의 확산과 그것에 맞서 사회를 보호하려는 반대운동이 충돌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함께 살고자 하는 관계의 회복 노력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여 치열한 경쟁에 놓여 있는 관계의 단절에 대한 대항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 노동은 상품인가?


시장유토피아론자와 정부개입론자들간의 인식의 차이는 노동에서 현격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장만능론자들에게 노동은 상품입니다. 시장의 메커니즘은 상품에 의해 작동됩니다. 상품은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생산된 물건인데, 노동도 생산을 위한 요소로서 상품으로 취급됩니다. 


그런데 시장의 자기조절기능을 비판하는 폴라니는 토지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노동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고유의 존재를 확인하는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폴라니가 노동을 상품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은 노동이 소유자의 욕구를 위해 마음대로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는 “그 소유자가 마구 써먹거나 하면 그 특별한 상품을 몸에 담은 인간 개개인은 영향을 받는다. 그 노동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사람의 육체적 심리적 실체도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다. 격심한 사회적 혼란의 희생양이 된다.”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단순히 시장에서의 상품이라는 허울을 씌워 인간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욕구를 부정하는 포괄적 인간의 파괴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므로 폴라니는 시장 경제를 “사탄의 맷돌”이라고 비유하기까지 합니다. 


실제로 인간은 그 기계를 가동시키기 위해 들어가는 투입물이라는 위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동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줄여야 하는 투입요소로 전락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원가를 낮추어 단위당 원가를 하락시키는 생산 방법은 시장만능주의론자들에겐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노동엔 인간의 영혼이 담겨 있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지요. 

이는 인간의 문화적 파괴를 가져오는 몰인간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시장의 유토피아를 벗어난다는 것이 시장의 폐지를 의미하지 않아


그렇다고 시장의 유토피아를 벗어난다는 것이 시장의 폐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시장은 제한된 자원을 가장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곳으로 배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장의 자원배분의 효율성의 장점을 살리면서 시장의 부정적인 면을 교정하는 절충적 시도가 강조됩니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인간적 감각을 계발하고  다른 인간들과 형제 자매가 되어 자연을 아름답고 유용하게 가꾸어가려는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받아들인다는 폴라니의 언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장유토피아를 극복하는 것은 시장의 긍정성을 살리고 그 파괴성을 억제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시장이 적절하게 기능하기 위한 조건들은 국가의 적절한 역할 담당입니다.


인간이 생산의 요소로서 상품이 아니라 생산의 주체로 인식되기 위해선 정부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최저임금제도가 소환됩니다.



◆ 최저임금제도 – 아름다운 공동체를 향하여


최저임금제도는 고용의 안정을 가져오고 소득상승효과를 가져옵니다. 이는 실질 소득 상승을 위해 더 일하려는 의지로 표현되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저임금제도는 일종의 효율임금 가설이 적용되는 것으로, 기업의 생산성 및 경쟁력을 높일 수 있으며 새로운 인적자원 및  혁신 성장의 동력이 됩니다.


결국 최저임금제도는 상품으로서 노동의 비용을 하락시켜 경쟁력을 유지하려는 생산전략을  지양하고, 노동자들의 사기를 올려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특히 가장 취약한 저임금 근로자들의 삶의 질의 향상은 최저임금을 통해서 관리될 수 밖에 없다는 지적입니다.  이들은 노조와 같은 협상기구가 없으므로, 정부가 사회안전망을 대신 구축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최저임금제도는 파레토 최적의 논리를 배격합니다. 한 구성원의 이익이 다른 구성원의 손해를 초래하여 자원의 최상의 배분을 주장하는 파레토 최적은 한 구성원의 이익이 다른 구성원의 이익을 상쇄시키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최저임금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중소 영세 기업들의 지불 능력 향상과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정부의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과 맞물립니다.  저임금근로자 보호를 최저임금제를 통해 기업에게만 전적으로 부담시킬 것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 적극적으로 모든 사회 소외 계층을 돌보는 보완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최저임금 보완책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입니다. 
 
또한 이러한 국가의 개입은 달리 말해 공동체 구성원간의 연대성을 의미합니다. 세금의 투입은 곧 공동체 구성원의 지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로 돕고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의 인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세의 투입을 낭비로 간주하는 인식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장 만능주의자들의 이기심과 오만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 193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인 1970년 대까지 직장은  미국에서 평생 직장이었으며, 단순히 월급을 받기 위해 다니는 곳이 아니라 서로  돕고 사는 일종의 공동체였습니다.  건강한 사회분위기가 인간을 박탈한 천민자본주의의 만연을 극복한 사례입니다.


인간의 노동을 상품으로 간주하는 인식에서 벗어나 영혼이 담긴 인간의 활동으로 받아들이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려는 노력은 이제 우리 모두의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나종석 (2009), “신자유주의적 시장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사회와 철학연구회

이근식(2008), “신자유주의의 평가와 전망”, 수행인문학

김강식(2007), “최저임금제도의 실태와 개선방안”, 질서경제 저널

칼폴라니, 홍기빈옮김 (2009), 거대한 전환